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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Jun 25. 2024

호박순을 올려주었다

오이순, 참외순, 수박순



뼈만 앙상했던 터널이 날로 풍성해지고 있다. 잎이 무성하다. 넓적한 초록 잎사귀들이 기어 다니며 바닥부터 점령해 간다. 터널을 지나가려면 조심해야 한다. 밟으면 안 된다. 잘못해서 순을 밟아 버리면 절대 안 된다. 농부 아빠 운다. 정신없이 구분이 안 되기 전에 호박, 복수박, 오이, 참외 순을 정리하고 터널로 유인해 주었다.



호박


바닥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초록잎과 엄마순, 아들순, 손자순. 순도 잎도 너무 많다. 구분이 안 되는 줄기들을 들어다 그물망에 그냥 척 걸쳐놓으면 안 될까. 일하기 귀찮은 농부 아낙 꾀를 내보는 이유는 이 순이나 저 순이나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농부 아빠는 호박 뿌리 하나에 어미순 하나만 찾아내 망에 올려 준다. 호박은 아들 순에서 열매가 열린다. 엄마 줄기를 따라가며 양 옆으로 아들 순이 뻗어나갈 테다. 터널 망에 자리를 잡으면 금세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테다. 호박잎은 쌈 싸 먹고 무쳐먹고 하던데 농부 아낙은 그런 것은 모른다. 그저 둥그런 호박 열매만 기다린다. 아들 잘 부탁해. 엄마가 알아서 올라가고 그 뒤를 자손이 줄줄이 따라 올라가면 좋으련만 방향을 잡아줘야 하는 건 헛똑똑이 나를 보는 것 같다. 그래도 똑똑이 농부 아빠가 3대 순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서 다행이다.


커다란 호박꽃이 핀 지 한참 되었는데 호박 열매가 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노란 꽃 아래쪽에 연두색 둥근 열매가 보인다. 며칠 후면 호박을 수확하겠구나 생각했다. 심지어 아기 호박이 여러 개! 한 번에 다 나오면 처치 곤란인데... 김칫국도 먼저 마셔준다. 탱탱볼만 한 호박이 금세 굵직하게 커지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나가보니 바닥에 후드득 모두 떨어져 있다. 수정이 안 되어 그렇단다. 호박은 암꽃, 수꽃이 따로 피는데 열매가 달린 꽃이 암꽃이다. 벌이 수꽃에 있는 꽃가루를 암꽃으로 옮겨 줘야 수정이 된다. 그래야 호박이 커진다.

호박 암꽃


벌아 벌아 꿀 따러 오너라.


호박꽃

벌 두 마리가 엉덩이를 쳐들고 정신없이 꿀을 딴다. 농부 아빠도 수꽃이 열린 걸 보기만 하면 따다가 암꽃에 문질러 줬단다. 벌과 농부아빠 덕분에 이번 일요일, 심은지 4주 만에 첫 호박을 땄다. 첫 수확한 호박은 연둣빛 고운 곡선을 가진 배불뚝이 둥근 호박이다. 호박 하나를 통째로 썰어 넣고, 파, 양파 넣고 보글보글 된장국을 끓였다. 애호박 된장국과 차원이 다른 푹 퍼진 구수한 호박 맛이 난다.



호박아 주렁주렁 열려라.


호박 순 올라간다




오이


모종을 심은지 3주 만에 첫 오이를 땄다. 요즘은 하루 대여섯 개씩 따고 있다. 반찬 할 새도 없이 잘라서 상에 놓으면 가족 누구나 하나씩 집어먹는 효자 식재료다. 어머님이 특히 좋아하신다. 무농약이라며 마음 놓고 껍질째 드신다.(무농약 아님 주의, 천연농약) 양이 너무 많아서  요즘은 딸 때마다 가져다 드린다.  


오이, 호박은 쑥쑥 자라니 어른들 마당에서 키우기도 제격이다. 농부 아빠는 어머님 마당에  오이와 고추 화분을 만들어 놓아 드렸다. 지난해에는 가로등 아래 화단에 심었더니 웃자람이 심해 망해버렸다.  올 해는 가로등 빛이 없고 해 잘 드는 마당 중앙에 놓았다. 정 중앙에! 아드님 하는 일이라 그러는 건지 식물 키우기가 즐거우신지 지난주 오이 하나를 땄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흙을 가득 채운 커다란 부직포 화분은 어른 둘이서 낑낑대며 들어야 들 수 있다.  화분 세 개를 놓고 양 옆에  파이프를 박아 줄도 매달아 주었다. 농부 아빠는 아침저녁으로 물을 줬는지 연락을 한다. 잎에 벌레가 있는지 쪼그라들었는지 색이 어떤지 안부를 묻는다. 어머님 안부를 묻는 것인지 오이의 안부를 묻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어머님이 자식농사를 잘 지은 것은 분명하다.


오이는 특히 진딧물이 많이 생긴다. 약을 안 칠 수 없다. 무농약은 아니고 수제 천연 농약을 쓴다. 남편 농부가 만드는 은행 삶은 물을 전착제와 섞어 뿌린다. 전착제는 약이 이파리에서 씻겨 내려가지 않고 잘 붙어 있으라고 같이 섞어 준다. 카놀라유를 넣어서 만든단다. 농부 아빠는 수제를 특히 좋아한다.


은행은 가을마다 주으러 간다. 우스갯소리로 아이들이랑 그런다.


아빠 또 은행 털러 갔다.


은행을 주워다 삶아서 식혀서 병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한다. 귀한 대접받는 은행물이다. 아이들도 아빠의 수제천연 농약을 안다. 4학년 달복이가 학교에 심은 오이 진딧물을 없애려고 얻어 가지고 갔다. 인기 만점이다.


우리가 천연 농약으로 농사를 짓는다고 하니 친정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 농약이나 저 농약이다 다 독약이다. 농부 아낙은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이가 풍년

오이도 암꽃, 수꽃이 있다. 열매가 달린 꽃이 암꽃이다. 그런데 오이는 따로 수정을 안 해줘도 주렁주렁 열린다. 신기하다.


호박과 수박이 이상한 건가? 갈수록 벌은 줄어들고 호박, 수박은 참 살기 힘들겠다. 호박, 수박이 힘든 게 아니고 미래에는 호박, 수박을 못 키우게 되는 건 아닐까? 스스로 번식하지 못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오이 암꽃
오이 순을 올려 주었다



참외


힘 없이 축 늘어져 누런 잎이 걱정되었던 참외도 초록 잎이 무성해졌다. 하천변 터널 맨 끝자락에 심는 작물은 아무래도 손이 덜 가고 생장이 느린데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번 일요일에 순도 잘 정리해 올려 주었다. 참외는 순이 너무 많이 나와서 늘 밭을 점령하는 녀석이다. 수정을 따로 시켜주지 않는데도 얼마나 잘 열리는지 모른다. 장수말벌이 떼로 몰려와 과육을 긁어먹기 때문에 작년 한 해는 무서워서 안 심었다. 대신 올해에는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터널 끝자락에 심자고 합의를 봤다. 마디마다 꽃 달리는 게 벌써부터 심상치 않다.


우리 집 주변에는 엄지 손가락만 한 말벌이 날아다닌다. 얼마나 뚱뚱했으면 호박벌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농부 아낙의 무의식이 벌의 크기를 키운 것이 절대 아니다. 농부 아빠도 목격한 그 대왕벌은 보이는 즉시 도망가야 한다고 한다. 쏘이면 병원행이다.


참외는 벌들의 식사 시간을 피해 따기로 하자. 참외야 우선은 주렁주렁 열려라.


참외 순 올려주다
참외꽃



복수박꽃
복수박 순 올려주다

작물들은 거저 크지 않는다. 햇살과 바람의 보살핌을 받고 하늘과 땅이 주는 물을 마신다. 뿌리로 땅과 거름 속 양분을 흠뻑 빨아들인다. 그러고도 모자라 벌들의 도움을 받고 농부 아빠의 손길도 바란다. 농부의 손길이 아니라면 비 오는 날 바닥을 기어 다닐 녀석들이다. 장마 전에 모두 올려 주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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