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한 하늘 잔잔한 바람

by 눈항아리

하늘이 차분하다. 무겁지 않으면서 얕게 깔린 구름과 흐리멍덩한 하늘은 왜 그런 느낌을 줄까. 도로를 달릴 때는 몰랐다. 주택가 어느 집 담장에 빼죽 튀어나온 덩굴식물의 줄기가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알았다. 그러고 보니 나뭇가지 흔들림이 없다. 바람이 없나 보다.


먼 산의 나무가 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게 내 눈에 보일리 없었다. 배추 속처럼 겹겹이 싸인 먼 산은 차분한 하늘을 이고 구름 한 층을 더 이고 한쪽 벽에 정물화처럼 배치되어 있다. 늘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있던 산이지만 오늘은 더욱 움직임이 없는 산과 하늘이다. 차분한 산의 자태는 어머니의 품과 같이 편안하다. 바람과 구름의 조화로 만들어 주던 산에 비친 구름 그림자도 오늘은 없다. 바람과 함께 달리는 하늘도 좋고 물속을 유영하듯 유유히 흐르는 하늘도 좋지만 바람 없는 정지된 듯 차분한 오늘의 하늘이 좋다.


잔잔한 바람은 마음을 잔잔하고 고요하게 만들어주나 보다. 달리는 도로에서 당당히 내 앞길을 가로막고 정지한 트럭을 만났다. 이런 경우를 길막이라고 하는구나. 그 트럭에게 화를 안 냈다. 소리도 안 지르고 투덜대는 말과 어떤 푸념도 없었다. 그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좌회전 차선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록불이 초록 화살표로 바뀌자 천천히 움직이며 속도를 내고 있었는데 앞서 가는 트럭이 횡단보도 정지선에서 멈춰 섰다. 그러곤 우회전 깜빡이를 켠다. 평소 같으면 벌써 욕을 하고 늦었다며 있는 성질 없는 성질을 다 꺼냈을 텐데, 왜 하필이면 내 앞에서 트럭이 그랬냐며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가만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은 다행히 직진 차선으로 들어갔다. 직진 신호를 받고 신나게 달리던 누군가가 양보를 해 주었는지 급하게 끼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트럭은 유유히 멀어져 갔다. 한참 시간을 끌어준 그 차 때문에 우리는 좌회전을 못했다. 정지선 맨 앞에 멈춰 서서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쌩 달려가는 트럭이 차선을 잘못 탔나 보다 생각했다. 꼬마 둘은 잠이 모자라 비몽사몽이고 큰아이 둘은 집에 떼어놓고 왔으니 등교시간 제약에서 좀 자유로워 그랬는지도 모른다. 차분한 하늘 덕분인 것 같다. 하루 사이 운전자의 마음이 고와졌나? 골목길에 차를 내리니 살랑바람이 분다. 은근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하늘이 차분하고 잔잔한 바람이 불어서 마음이 차분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차분해서 그렇게 느껴진 건지도 모른다.


잔잔한 하늘이

잔잔한 마음을 만들기도

잔잔한 마음이

잔잔한 하늘을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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