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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근영 Dec 02. 2024

스쳐 지나가는 것들

휙휙 스쳐 지나간다.


그녀가 스쳐 지나간다. 보행보조기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그녀의 옆을 앞질러갔다. 우리는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아쉬움이라고는 없다. 그녀도 나를 모르고 나도 그녀를 모른다. 그러니 스쳐 지나간다고 아쉬울 것이 없다. 오늘도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는 그녀는 매일의 풍경과도 같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우리는 서로의 풍경이다.


트럭이 스쳐 지나간다. 시골길 좁은 차선도 마다하지 않는 대형 트럭이 스쳐 지나간다. 트럭아 제발 속도를 늦춰. 제발 트럭아 중앙선을 넘어오지 마. 덩치 큰 트럭은 부담스럽다. 오늘따라 더 많은 덤프트럭이 스쳐 지나간다.


노랑빛 선명하던 은행나무는 황량한 나뭇가지를 찬 바람에 내놓고선 마지막 은행잎을 떨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찬바람에 남은 잎이 떨어질까 애가 마른 것일까. 전혀. 홀가분하게 훌훌 벗어던진 나무는 꿋꿋하게도 서 있다. 미련 없이 말끔하게 내년을 준비한다. 겨울이 오면 봄이 올 것을 나무는 알고 있다. 아직 떨어지지 못한 빛바랜 누런 은행잎 옆을 스쳐 지나간다.


평소보다 뿌연 공기가 하늘을 희끄무레하게 만들었다. 시계가 좋지 않은 날은 볼 수 없는 푸른 준령. 겹겹이 쌓여 있는 흐릿하고 푸른 산이 멀리서 스쳐 지나간다. 굽이굽이 눈 쌓인 골짜기 하얀 빛깔과 푸른 산등성이가 조화롭게 뒤섞인 병풍과도 같은 풍경을 둘러보는 재미가 없으니 아쉽다.


같은 도로를 매일 달린다. 흐릿한 날은 또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오늘의 이 도로를 스쳐 지나간다. 지나가고 나면 다시 생각날 리 없는 지나온 길을 그저 달린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 먹먹하지만 햇살을 품고 있는 웅장한구름, 기어이 희뿌연 공기를 뚫고 나온 햇살, 햇살은 여전히 비쳐 들어온다. 햇살을 피하려고 눈을 부릅뜬다. 전방을 주시한다. 바쁜 날은 한 눈을 팔지 않으니 더욱 눈부시다. 따뜻하다. 따뜻한 아침이다. 꼬마 둘은 머리가 안 보인다. 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무엇이 스쳐 지나가건 말건 잠든 아이들은 아쉬워할 것도 없다. 앞을 보며 달리는 사람만이 이 시간과 공간을 누리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운전을 하니 어쩔 수 없이 깨어있어야 한다.


스쳐 지나가버린 것들은 그냥 보내기 아쉬운 것도, 그저 지나가버리는 것도 있다. 아쉽다고 지나온 길을 포함한 시간과 공간들을 평면 지도에 담아 돌돌 말아 가지고 다닐 수도 없다. 아쉬운 것도, 그저 그런 것도 두고 가야 한다.  


며칠 전에는 떨어지는 낙엽이 아쉽다고 사진을 찍고 주워 담기도 했다. 그것이 내 주머니에 남았던가. 그저 잔잔한 추억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것이 남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 차츰 흐릿하고 희미해지며 뿌연 연기처럼 변해버리고야 만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모두 그렇게 선명하다 희미해지고 형체가 없어지다 사라진다. 나는 무엇을 잡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형체 없는 것들을 잡으려고 하는 것일까.


흐린 날, 흐리멍덩한 날,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날, 바빠서 앞만 보고 가는 날은 무언가를 놓치고 가는 것 같다. 그 길에 나는 무엇을 두고 온 것일까. 창문은 꼭꼭 닫아걸었는데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무언가를 바람에 구름에 흘려버리고 온 것만 같은 느낌이다.


문득 지나온 길 위의 시간과 공간을 돌이켜 보는 이유를 가만 생각해 본다. 12월이라서 그런가. 찬 바람이 불고 한 해를 보내야 해서 그런가 보다. 한 해를 보내기가 먹먹해서 그런가 보다. 흐린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 내 젊은 날이 아쉬워 달린 길을 더듬어 보았나 보다. 지나온 날들에 미련을 뚝뚝 흘리는 걸 보니 나도 나이가 드나 보다. 그래 그 길에 내 청춘의 날들을 흩뿌리며 신나게 달렸구나. 하루라도 젊었던 날들이 아쉬워 나는 그 길을 다시 되짚어 봤구나. 한 해가 지난다고 바로 호호 할머니가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한 해를 보내는데 미련이 생기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전에 없이 송년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출근길은 그대로인데 나는 매일의 길을 시간 속으로 보내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과거라는 단어 속에 넣어두고 나는 지금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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