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근영 Nov 30. 2024

하얀 눈밭의 풍경

첫눈 내렸다. 꼬마 둘은 거실로 나와 마당과 산과 하늘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추위가 시작되며 얼마나 기다리던 눈이던가.


출근차를 끌고 나가야 하는 부부는 갈 길이 걱정이다. 전기 트럭은 놔두고 가야 했다. 눈길에서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4륜구동이 되는 차에 모두 타고 가야 했다. 모두 함께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유리창에 쌓인 눈을 치우고 사이드 미러에 쌓인 눈도 닦아 내고 출발한다. 다행히 얼어붙지 않아서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밭에는 초록 대파가 펑펑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대파를 화분으로 옮겨야지 하며 기회만 엿보던 남편은 차를 출발해 가면서도 파에게 눈을 거두지 못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출근을 해야 하니 파는 얼어 죽지 말라고 빌어주는 수밖에. 들판은 흰 눈밭이 되어 있었다. 나무도 지붕도 모두 하얀 나라가 되었다.


하얀 밭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무 밭에서 사람들이 하얀 눈사람이 되어 무를 뽑고 있었다. 이런 생경한 장면을 목격하다니! 무 수확이 늦어진 것이 아니라 눈이 너무 일찍 오는 바람에 미처 뽑지 못한 것이다.


“어쩌냐. 무는 얼면 바람 들어 못 먹는데. ”

발 동동 구르는 농부의 마음에 동화되어 한 마디 했더니 남편의 반응이 싸하다. 우리 대파는 걱정이 안 되고 남의 밭에 무는 걱정이 되냐고 한다.

“그럼 당연하지. 우리야 먹을 거지만, 저들은 팔아야 하는데 그럼 걱정이 안 돼? “

말은 그렇게 해 놓고선 늘 우리 대파를 경시하던 마음이 콕콕 찔렸다. 남편은 어느 날은 파를 싹 다듬어 주방에 놓아주었다. 시간이 부족한 어느 날은 흙 묻은 대파를 농사 바구니에 담아 가게까지 싣고 왔다. 그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왜 자기 파는 안 먹냐며 타박을 하곤 했다.


점심엔 찔리는 마음에 흙파를 다듬었다. 파 국을 끓이는 것과 같이 파를 듬뿍 넣은 어묵탕을 했다. 파국은 안 끓여 봤으나 물 반 파 반을 넣고 푹 끓이면 파국이 되지 않을까? 파를 많이 넣으면 국물 맛이 끝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통마늘을 넣고, 자른 다시마 두 개, 무, 고추를 넣었다. 후추를 톡톡 뿌리고 어묵탕 액상스프까지 넣으면 완성! 예전에 캠핑을 한참 다닐 땐 넓적한 어묵과 나무꼬치를 사서 손수 끼웠는데 요즘은 냉동 꼬치 어묵이 잘 나와 가끔 마트에서 데려온다. 추운 겨울날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 딱이다. 파국을 떠먹으며 아이들이 얼마나 맛있다고 하는지 모른다. 여보 나는 파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요. 듬뿍 넣은 파를 보셨지요?


대파는 부직포 화분에 심어 겨우내 창고에 보관한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놓아두고 가끔 물을 주며 봄까지 뽑아먹는다. 지난해 겨울에는 화분 두 개가 봄까지 살아있었다. 다 심고도 남는 파는 국물용, 볶음용으로 잘라 냉동한다. 겨울 동안 파를 안 사 먹고 지낼 수 있다.


첫눈을 보며 환호하던 꼬마들은 바쁜 등교 시간 때문에 눈 한 번 만져보지 못했다. 학교 가서 눈이라도 만져보라며 스키 장갑을 챙겨주었다. 그러나 학교 주변에는 눈 쌓인 곳이 없었다. 퇴근 무렵부터는 눈이 그쳤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왔을 땐 높다란 창고 지붕에만 눈이 남이 있었다. 꼬마들은 아쉬워했고 다른 가족 넷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달복이는 눈삽운동을 못해 서운하다고 했다. 복실이가 물었다.

“엄마 눈이 오면 나도 눈삽운동 해야 해요? ”

“그럼 당연하지. 복실이도 언니가 됐잖아. ”

“전 아직 2학년 밖에 안 됐는데요? 눈싸움하고 눈사람 만들면 좋겠어요. ”

오빠가 눈삽운동을 하고 싶다니 저도 해야 하는 줄 알았나 보다. 아이는 한 걱정을 하고 엄마는 그런 아이를 골려먹는 재미에 빠졌다.

“작은 눈삽으로 준비해 줄게 복실아. ”


이번 주엔 남편의 트럭도 내 차도 스노 타이어로 바꿨다. 성큼 다가온 겨울이 춥다. 그러나 늘 그렇듯 조금씩 준비하고 적응해가고 있다. 긴 겨울을 위해 우리는 늘 그렇지 않은가.


신록의 봄은 찬란하지만 짧았고 여름의 더위는 길고 지독했던 것 같다. 선명하던 가을은 또한 짧았고 이제 이제 긴 겨울을 준비한다. 겨울의 추위는 지독하게 기억되겠지만 하얀 눈 밭의 풍경만은 아름답게 남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