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을 옮기다45
식구들이 일어나는 모습을 아침에 가만히 보았다. 누구든 일어나는 남자 가족은 먼저 소파에 가 앉는다. 소파에 앉아 정신을 차린다. 무조건 자신의 방에서 나와 눈을 반쯤 감고 몸을 기댈 곳을 찾아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는 것이었다.
그건 앉는다기 보다 그냥 눕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더 자고 싶지만 일어나야 하니 억지로 몸을 이불에서 데리고 나와 소파에 기댄다. 앉아 있으나 눈을 감고 있다. 심지어 달복이는 가끔 누워있다. 생각해 보니 소파에서 다시 잠든 달복이를 깨워 밥상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많기도 했다.
신기한 건 넷이 한꺼번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한 명씩 돌아가며 같은 자리에 앉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남자 넷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계속 앉아 있느냐. 그것은 아니다. 잠시 잠깐 앉았다 “밥 먹어! ” 소리에 바로 일어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엄마의 알람 소리는 침대에서 보다 더 잘, 가깝게 들린다.
“일어나! ”
“밥 먹어! ”
“복동아! ”
깜깜한 밤으로부터 탈출해 아침의 시작을 소파에서 시작하는 그들. 자신들이 어디에 가 앉는지 그들은 의식하고 있을까? 아마도 무의식 중에 그저 평소의 습관대로 소파에 가 앉아 있겠지?
남자 넷에게 소파는 밤과 아침의 경계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다.
복실이는 보통 늦게 일어난다. 아침의 소파에 기대앉을 새가 없다. 황금 같은 아침의 시간이 쏜살같지만 복실이를 깨울 때만은 엄마의 목소리가 다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랑을 담아 “일어나 잘 잤어? ” 어르고 달래 안고 나와야 겨우 아침을 맞는 어린이다. 그것이 복실이를 깨우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 복실이도 아주 가끔은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소파에 누워 다시 잠을 잔다.
소파에 빨래가 없다는 건, 소파가 비어 있고 소파의 역할을 다한다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작고 사소한 아침의 시작을 위해 주부는 오늘도 빨래를 갠다.
나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일상은 아름답다.
곧 게슴츠레 눈을 하고 산발 머리를 나풀거리며 그들이 온다. 어떤 이는 까치집 머리, 어떤 이는 폭탄머리. 또 어떤 이는 한쪽만 푹 눌린 머리. 세상사 모든 근심을 내려놓은 자연 그대로의 허술함을 안고 그들이 온다. 어기적거리는 걸음을 하고 문지방을 건너 거실로 나올 테다. 그러곤 정신을 차리러 혹은 잠과 깸의 경계에서 조금 더 머무르기 위해 하나 둘 소파에 와 앉겠지? 이런 무방비한 상태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가 알까? 노력하고 의식하는 자만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매일 아침 소파를 주시하라. 아침의 기쁨은 이곳에서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음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