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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의지를 가지다

시작이 반

by 눈항아리 Feb 20. 2025
살림의 주인 되기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이것저것 궁리하기.
이리저리 움직이기.

계획은 허술하나
생각만은 퐁퐁퐁 샘솟는다.

나는 나의 살림을 사는 사람이다!
나는 살림의 주인이다!
매일 외친다.

모가나 잘 구르지 않는 나의 살림도
잘 구르는 날이 오겠지?


지난번 된장 만들기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한 번에 성공할 수 있겠는가. 야채를 샀다는 것에 후한 점수를 주기로 했다. ‘대용량’과 ‘즉흥적인 것’은 앞으로 조심하자. 무기력한 살림을 위한 첫발을 떼었다 할 수 있으니 긍정적이라 생각하자. ‘된장’이라는 실수가 살림의 성공이라는 길을 열어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다 ‘기적’이라 이름 부를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야채 기피 어린이 복이가 브로콜리를 먹었다. 남이 보기엔 브로콜리 한쪽 먹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며 호들갑을 떤다고 할 테다. 그러나 라면을 밥보다 많이 먹고 3종 치즈를 즐겨 먹으며 그것도 모자라 파마산치즈 통을 들고 후춧가루 털듯 탈탈탈 한입에 털어 넣는 대단한 우리 아들. 매일 음식만 먹으면 화장실로 달려가는 아들. 그런 복이가 스스로 먹은 야채 한쪽의 의미는 크다. 그게 초고추장의 힘이든 엄마의 노력이든, 초록과 빨강의 오묘한 색깔의 조합 때문이든 이유에 관계없이 기적이라 부를 만한 일이다. 야채를 열심히 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된장국거리와 비슷한 것을 빨리 만들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다. 사실 된장국거리는 정말 좋다. 깜빡 잊고 된장만 안 넣었을 뿐, 완벽하다고 봐야 한다. 된장 한 숟가락만 넣고 냉동 국거리를 넣고 물 넣으면 국 끓이기 완성이다. 준비 1분, 된장국 끓이기 10분 완성. 남편이 놀랄 정도다. 살림을 살면서 이렇게 빠르게 성과를 낸 건 처음이다. 만드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딱 좋을 텐데. 종류별로 많이 만들어두면 참 좋겠다. 시간 절약이 관건이다.  


남편은 ‘된장국거리’에 진심으로 감동을 받았나 보다. 어느 날 마트에 간 남편이 순대볶음과 마라탕 밀키트를 사 왔다.(물론 마트 전용 장바구니, 20리터 봉지 안에는 스팸 2개와 컵라면 5개, 스파게티 소스도 들어있었다)  밀키트는 내가 소분한 ‘된장국거리’와 비슷한 모양새다. 마라탕은 모든 식구들이 못 먹을 맛이라고 했다. 순대는 모두 맛있다고 했다. 남은 양념에 밥까지 볶아서 맛있게 먹었다. 주부표 밀키트를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부가 움직이자 곳곳에서 작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성공은 작은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내 걸음은 비록 즉흥적인 손가락 놀림(야채 박스 주문)으로 시작되었으나, 작은 시작도 엉망인 시작도 괜찮다.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살림의 주인이 되기로 했다. 어떤 주인님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 분명하다.



반찬통을 집합시켰다. 우선, 무엇이든 종류별로 많이 만들어 두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 가게에 원정 나간 온갖 뚜껑 잃은 반찬통을 집으로 옮겨왔다. 내가 스스로 통을 챙긴 것은 처음이다. 내가 안 챙기니 반찬통은 이산가족이 되어 떠돌아다녔다. 남편이 가끔 챙겨 오면 짝짝으로 아무것이나 싣고 아무 데나 내려놓기만 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내 밥그릇을 챙길 것인가. 나 스스로 살림의 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많은 것을 바꾼다. 뚜껑 없는 반찬통은 현관문을 통과해 거실에 입성했다. 대기 중이다. 김치통 다섯 개 분량이다. 뚜껑은 버리지 않고 주방에 잘 모셔두었었다. 언젠가 짝꿍을 찾아주리라 벼르고만 있었는데 드디어 한 곳에 집합시켰다.(조금 더 가까운 곳에)   그리고 다음날 이산가족 찾기가 시작되었다. 금방 끝난 그날의 현장에서 반 정도는 짝을 찾지 못했다. 내 죄가 크다. 그동안 살림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게 버려둔 주부의 죄. 그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하며 나중에 2차, 3차 이산가족 찾기 반찬통 현장에서 다시 보자 약속하며 밥솥 아래 수납장에 고이 모셨다.


집합의 현장이 아니다. 이산가족 찾기가 끝난 후 남은 반찬통과 뚜껑들. 그들의 가족 찾기는 이루어질 것인가. 과연.집합의 현장이 아니다. 이산가족 찾기가 끝난 후 남은 반찬통과 뚜껑들. 그들의 가족 찾기는 이루어질 것인가. 과연.


아이디어가 튀어나온다. 장 봐온 야채는 집에 가지고 오면 바로 다듬을까? 썰어서 바로 된장용, 볶음용, 볶음밥용 등으로 만들어 소분하면 어떨까? 등의 아이디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내 삶을 내가 이끌어 간다는 느낌이란 이런 것이구나, 냉장고 문을 열면서 생각했다. 내가 살림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건가? 주도적 학습이 좋긴 좋다더니 이것이 신세계다. 야채를 종류별로 사 와서 얼른 저장해 두고 싶은 충동이 또 일었다. 그냥 마구 저지르면 안 되니 나를 잘 타일러야 한다. 좀 더 생각을 하자.   


그럼  이제 움직여 볼까? 마늘을 꺼냈다. 마늘은 몇 쪽 안 사용하니 늘 남는다. 마늘 한두 알을 요리에 넣자고 도마와 칼을 꺼내기 귀찮고 칼로 잘라 쓰자니 영 마음에 안 찬다. 하나 둘 넣자고 절구를 꺼내 쓸까? 오랜만에 절구를 꺼냈다. 마늘 작은 봉 하나를 다 넣고 찧었다. 실리콘 마늘 트레이에 담아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뚜껑을 닫았다. 꽁꽁 얼렸다. 뚜껑이 있어서 재놓기도 좋다. 마늘 한 톨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쓸 수 있다. 일주일은 마늘 걱정 없이 요리할 수 있겠다.


실리콘 냉동 마늘 보관 트레이실리콘 냉동 마늘 보관 트레이


밥통의 밥은 늘 남는다. 버려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때론 내 밥이 모자라 밥 대신 라면 먹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남은 밥은 바로 밥용기에 담아 냉동하기로 했다. 곧바로 잊지 않기 위해 밥 저장용기도 한 세트 시켰다. 스테인리스 밥솥을 위해서도 아주 탁월한 선택이다. 아침의 밥 걱정도 줄일 수 있으니 일석삼조.


생각만 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움직여야 한다. 기다리지 말고 바로 행동하자. 기다리다 보면 미루게 된다. 미루면 쌓인다. 쌓인 대로 잊힌다. 잊힌 것은 그대로 덮여 사라진다. 나의 일이 아닌 것으로 버려지고 방치된다. 방치된 살림살이가 정말 많다.


나는 내 살림의 주인이다. 덮어 두었던 살림 바구니를 하나씩 열어보자.




별것 없는 계획을 세우는데 사흘을 보냈다. 매일 어떤 청소를 하고 몇 분을 투자하고 이런 엉터리 계획이다. 그리고 열심히 얼갈이된장국만을 먹고 있었다. 계획만 세워선 안 된다. 행동하자. 이루어져야 비로소 멋진 계획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어제 된장국을 벗어나 미역국을 끓였다. 미역을 자글자글 볶아 한 통을 소분해 얼리고 한 냄비 끓였다. 국이 남아 끓이고 데우고 그러고도 남아 다음날까지 먹지 않을 테다. 미리 적당히 덜어 보관하겠다. 미래를 준비하는 주부가 될 테다. 밥 준비가 안 된 날 냉장고 한 구석에서 나를 보며 윙크를 날려줄 미래의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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