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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May 21. 2024

허약이 농부 아낙의 흥

계단 오르기가 힘들다. 허벅다리 앞뒤 양방향 모두 근육통이 생겼다. 다리를 부여잡고 올라가는데 계단 정면에 앉은 단골손님들이 자꾸 날 보며 웃는다. 60대 중년 부인들 셋. 젊은 사람이 계단을 겨우 오르니 민망하다.




까만 밭을 누르고 당당하게 섰다. 오래간만에 농사다운 농사일을 한다. 몇 번 없는 기회가 드디어 왔다.


오늘도 완벽한 준비 점검해 볼까?

새로 산 남색 창 넓은 농사 모자 장착

얼굴만 빼꼼 내밀고

망사로 양옆과 뒷머리, 목까지 완전 차단.

선크림은 패스.

날이 더우니 반팔에 시원한 쿠울 토시 장착.

벌레가 와도 못 뚫을만한

두툼하고 기다란 청바지를 입고

기다란 양말을 신었다.

바짓단 위로 장목 양말을 쭈욱 늘려 올린다.

발목과 장딴지도 안전 확인 무.

깜장 장화에 두 발 모두 장착.

까만 손바닥이 특징인 농사 장갑도 장착 완료!

틈새라고는 얼굴뿐.

숨은 쉬어야 하니 얼굴은 내놓고 출발!


까만 밭으로 간다. 까만 밭 뒤로 초록풀이 있으니 괜찮다. 초록나무 위로 하늘도 보인다. 파란 밭으로 간다.




나는 전문 농사꾼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전문가다운 포스로 출발! 오른손엔 호미 왼손에는 고추 모종이 가득 든 까만 판때기. 왜 다 깜장인가. 나도 초록 물결을 좋아한다. 푸른 하늘을 좋아한다.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시작!


오른 골부터 앞으로 나가며 고추 모종을 척척척 놓는다. 역시 전문 농사꾼다운 풍모가 느껴진다. 척척척. 몇 개 놓고는 다시 돌아와 호미로 흙을 파고 모종을 넣고 다독다독한다.


앞서 나가며 물조리로 구멍에 하나하나 물을 주던 농부 아빠 물 주기 귀찮은가 보다. 점적 호스 물을 틀어 버린다. 구멍 양쪽으로난 두 줄 호스가 젖어 들어 까만 제초매트에 진하고 더욱 까만 두 줄이 생겼다. 내 손 깨끗하게 다 심고 나서 물을 주면 좋으련만... 금세 손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물과 범벅이 된 흙투성이 손. 괜찮다 장갑을 꼈으니까.


빼꼼히 하나 내놓은 얼굴에 흙탕물이 튀었다. 흙 묻은 손으로 얼굴을 닦아줄 수도 없고 시이이이이~ 마스크를 쓸 걸 그랬다.


고추 모종 150개를 빠르게 심었다. 농사꾼의 후예다. 까만 밭을 누비는 농부 아낙 일에 속도가 붙는다. 이제 남은 것은 터널에 심을 녀석들이다.


호박, 방울토마토, 토마토, 복수박, 오이, 참외


끝!





농부 아빠가 휘 둘러보며 감독을 한다. 토마토는 눕혀서 어쩌구 휘어진 부분이 어쩌구 땅 속 깊이 어쩌구 심어야 한다며 훈계를 한다. 농사 공부를 하신 농부 아빠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짤막한 방울이 세 개는 그냥 두고 구불구불 기다란 토마토 모종을 움켜쥐고 쑥 뽑았다. 아무리 깊게 파도 심고 나면 휘어지는 못난 녀석. 그래서 옆으로 뉘어서 심으라고 하나보다. 고구마순처럼 눕혀서. 그런데 토마토 모종은 꽤 크다. 주먹손을 제초매트 아래로 집어넣어 한 움큼 흙을 파낸 후 토마토를 잘 눕혀줬다. 하늘을 향하도록 구부러짐 없이 꼿꼿한 토마토가 되도록 심었다. 역시 전문가다운 풍모를 지닌 농부 아낙이다. 완벽한 일처리에 박수를 보낸다.


터널에 기어오르는 작물까지 모두 심었다.


끝!


너무 빨리 끝났다. 한참 일에 흥이 나고 있는데.


곡괭이를 들고 와 생강 심을 빈 밭에 올라오는 잡초를 파본다. 힘들다. 풀 머리를 잡고 당겨본다. 쑥쑥 잘 뽑힌다. 그런데 흙을 털어야 해서 귀찮다. 이번에는 낫을 들고 나왔다. 역시 농사일은 여러 장비를 사용하는 손맛이다. 왠지 호미와 낫을 들면 진짜 농사꾼이 된 것 같다. 왼손으로 풀을 잡고 석석석 베어야겠지만 허리 굽히기가 귀찮다. 귀중한 내 허리를 지켜야 하니 꼿꼿하게 서서 일할 방법을 고심해 본다. 올봄에 내 돈 내산으로 구입한 긴 장대 같은 낫은 어디다 뒀더라. 가게에 어디 박아 뒀나 보다.


그냥 낫을 들고 휘두른다. 옥수숫대를 자르는 것과 같은 힘으로 강력하게! 가는 풀을 낫 한 번의 휘날림으로 쳐낸다. 장검으로 대나무 베기 시연을 보이는 검사의 풍모를 닮았다. 농부 아낙 멋지다. 농부 아빠는 그걸 왜 하고 있냐며 예초기로 한 번 돌리면 된다고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에 흥이 오른 농부 아낙 땡볕 아래 낫 휘두르기에 심취했다.


일을 하면 끝을 봐야지.


황톳빛 무른 흙을 밟으며 기분 좋게 떠돌아다닌다. 까만 밭에서 일하다. 폭신한 흙을 밟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풀을 비슷한 길이로 잘라준다. 얼마전 뒤집어준 밭이라 되살아난 풀이 얼마 없다. 장비가 들어가 뒤엎었는데도 다시 일어난 생명력 거센 아이들의 머리를 이발해 주는 느낌으로 예쁘게 잘라준다. (가차없이 쳐준다.)


밭 가생이 올라오는 잡초도 잘라줄까? 느낌 좋으니 그럼 시작? 신들린 듯 낫을 휘둘렀다. 아이고야. 힘들다! 아까아까 들어갈걸. 사방에  키다리 풀들을 모두 쳐주었다. 잘 정돈된 밭을 보며 기분이 좋다.  


이제는 들어갈 시간 2시간 풀타임 끝!




들어와 우선은 물을 안 준 아이들에게 푸념을 하고  얼음물을 주문해 배달을 시켰다. 물을 줘야지잉. 농부 아낙 까만 밭에서 시들어버릴 뻔했다고.  


씻지도 못하고 소파에 널브러졌다. 에어컨 바람이 솔솔 시원하다. 정신없이 잠들었다. 허약한 몸뚱어리 낫을 들고 날뛸 때부터 알아봤다.




10년 단골 부인들 또 “끌끌끌” 웃는다.

(끌끌끌은 웃음을 참는 표현임)


“제가 어제 밭일을 좀 해서요.”


허약한 몸뚱어리. 낫을 휘두르지 말 것을. 낫을 휘둘러서 그런가 어깨도 뻐근하다.


그러나 허리를 지켜 만족스럽다. 나는 허리 꼿꼿한 농부 할머니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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