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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Jun 04. 2024

왕지네 나타나다

시골의 동물들

다사다난한 날들입니다.


아침에 집에서 탈출을 했습니다. 머리는 산발한 채로 아이들도 모두 씻지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늦은 아침을 먹었지요. 설거지를 가득 쌓아두고 김치통은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한 채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다행히 잽싸게 가방에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나왔지요. 그리고 가방 두 개만 챙기면 만사 오케이지요. 그런데 웬걸 핸드폰도 아이패드도 모두 집에 내팽개치고 탈출한 겁니다. 이런 불상사가 있나.


그러나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왕지네가 나타났습니다.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왕지네가 나타났습니다. 20센티미터는 족히 되는 길이. 구불구불 몸을 자유자재로 구부리며 빠르게 발을 놀리는 녀석이었습니다. 어느 구석에서 나왔는지 머리에 회색 먼지를 한 바구니 쓰고 있었지요. 방향 감각을 잃었는지 다행히 다시 어느 틈새로 도망가지 못하고 벽 쪽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녀석 정말 피신을 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실은 엄청 빠른 녀석인데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거든요. 큰 아이와 엄마의 꽥꽥거리는 비명 소리에 왕지네가 정신줄을 놓은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지요. 지속적인 고음 공격, 일명 음파 공격에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작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지네가 도망 가나 안 가나 보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쉬어버렸습니다. 중고등 시절 체육대회 때면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었지요.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는 목 아픔입니다.


남편은 출근을 한 상태였습니다. 왕지네를 만난 엄마가 정신줄을 놓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으니 얼마나 아이들이 놀랐겠습니까.  지네를 못 본 꼬마들도 덩달아 소파 위로 책상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다행히 둘째 복이가 해결사로 나섭니다. 우선 핸드폰을 가져옵니다.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처리반이 아니고 구경반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어 아빠에게 전송을 하고 친구들에게 올릴까 물어봅니다.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엄마는 그저 미니 의자 위에서 벌벌 떨고 있을 뿐입니다. 소리를 지르며.


구경이 끝난 복이가 복장을 갖추고 옵니다. 자전거 타는 복이 겨울 자전거 장갑을 끼고 옵니다. 엄마는 친절하게 고무장갑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신발은 장화를 신고 마구 거실에 걸어 다니라고 했지만 앞만 막힌 고무 슬리퍼를 신고 옵니다. 오른손에 반투명 플라스틱 통을 들고, 왼손에 묵직한 멍키스패너를 들었습니다. 우리의 영웅이 등장했습니다.


내려칠 것인가 통에 가둘 것인가. 복이는 성큼성큼 다가서더니 재빠르게 통 안에 녀석을 가두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지네 몸이 끼었습니다. 플라스틱 통이 너무 가벼워 손으로 누르고 있는데도 움직입니다. 칼을 달라는 복이, 칼은 절대 안 된다는 엄마. 자르면 된다는 아들, 그러다 도망가면 어쩔 것이냐는 엄마. 대치가 이어지고 고성이 오가고. 엄마는 플라스틱 통이 통째로 들어갈만한 은색 볼을 건네주었습니다. 지네와 플라스틱 통이 엎어놓은 은색 볼 안에  무사히 들어갔습니다. 위를 향한 은색 볼 바닥에 멍키스패너를 올려 두었습니다.


이제는 감옥입니다.


지네를 안전 감옥에 가두어 두고 우리는 탈출하였습니다. 씻지도 못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왔지요.


제발 지네가 멍키스패너를 들어 올릴 힘을 내지 못하도록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하루 종일 멍키스패너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연 지네가 감옥에 갇혀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도망가 집 어딘가에 살고 있다면...



지네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뛰고 벌렁거립니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먼저 들어와 안전 감옥에 있던 지네를 처단하였지요. 그래도 바닥으로 아직 못 내려가고 있습니다. 책상에 계속 앉아 있을 수도 없고... 내려가야 하는데 ... 오늘 잘 수 있겠지요?


지네 약을 집 주변에 놓기로 했습니다. 비가 그치면 꼭 놓기로 했습니다. 시골집에는 지네가 삽니다. 산 가까이 사니 그렇습니다.


발을 조심하세요.

휙 무언가가 지나가나 확인하게 됩니다. 까만 무엇만 보면 꺅! 소리를 지릅니다.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요동을 치는 날들이지요. 기쁨, 슬픔, 환호, 벅참, 실망, 놀람, 두려움.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해야 할까요? 어떤 놀라움이 나를 찾는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고요를 바랍니다.


2024년 6월 2일 블로그 발행글입니다.




지난주에는 풀숲에서 뱀, 이번에는 집에서 만난 왕지네 덕분에 주말의 모든 일을 뒤로하고 농부 남편은 집 주변과 밭을 둘러가며 제초 작업을 하였다. 잔디보다 더 많은 잡초, 그러나 잔디밭이라 부르는 잡초 정원을 까까머리로 이발시켰다. 풀을 얼마나 깎았는지 손아귀가 아프다고 한다.


시골살이를 결심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많은 동물들과 마주할 용기가 있느냐이다. 고라니와 야생 고양이는 귀엽다. 다람쥐인지 청설모인지 모를 녀석도 나무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이쁘다. 철마다 노래하는 고운 음색의 새들은 상쾌한 새벽을 열어준다. 봄이면 개구리가 창문가에 놀러 오기도 한다. 여름이면 매미가 창가에서 독창을 뽐내기도 한다. 가을이면 귀뚜라미를 비롯한 풀벌레 소리가 정겹다. 크고 다양한 벌들이 밭에서 꿀을 나르고 꽃들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모습은 평화롭다.


그러나 벌들이 집 주변 우체통이나 벽 귀퉁이, 처마 등에 집을 짓고 꽃과 우리 집 사이를 왕래한다면 느낌이 다르다. 마당을 가르는 벌들의 비행. 장수말벌이 떼를 지어 참외밭에서 참외를 긁어먹는 걸 보는 건 괴기영화를 보는 듯하다. 또 언제 다 먹고선 떼를 지어 없어진다. 밥때가 따로 있는 듯하다. 뱀이 집 주변에는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며 집 근처를 배회하는 야생 고양이에게 부러 친한 척을 하기도 한다. 지네는 어떻게 집으로 들어오는지 알 수 없다. 왕지네는 지난해 한 번, 올해 한 번 나왔다. 작은 지네는 가끔 나오는데 지네를 본 이후로는 그리마는 귀여운 아가들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집 근처에 이웃한 감자밭이 부산스러웠다. 흰 트럭이 며칠 밤샘을 하더니 그 후로 불 켜진 경운기가 밤새 털털거리며 돌아갔다. 밭 주위로 동물을 쫒는 남루한 흰 봉투를 뒤집어쓴 유령 모습의 허수아비가 세워졌다. 밭주인을 만난 농부 남편의 말로는 멧돼지가 감자밭을 삼분의 일 가량을 파헤쳐서 망쳐놨다고 한다. 흰 트럭은 멧돼지를 잡을 포수의 트럭이었고, 밤새 털털거리며 경운기가 감자밭을 지킨 것이었다. 멧돼지는 아직 못 봤는데 아이들의 밤 외출 시 조심하라고 당부를 했다. 이제는 멧돼지까지 출몰하는 것인가. 멧돼지 소식은 올해 처음 듣는다.


시골살이를 하고 싶다면 너무 깊은 산중은 아닌지  마주칠 수 있는 동물이 누구인지 꼭 알아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과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농촌살이도 그럭저럭 즐길 수 있다. 참외를 잘 먹는 장수말벌 떼 정도야 잠시 피하면 된다.


그러나 집 안에 나타난 지네는 정말 계속 생각이 난다. 또 나올까 발바닥이 자꾸 곱으며 움츠러든다.


농촌 살이 결코 쉽지 않다. 잡초는 애교쟁이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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