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가 내렸다

부직포 화분에 키우는 고추 이야기

by 눈항아리
고추테리어는 부직포 화분에 키우는 고추 한 그루의 이야기입니다.
반려식물과 함께 호흡하는 일상 이야기입니다.
좁은 부직포 화분 속 작은 생명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고추테리어는 고추와 인테리어의 조합입니다. 제가 만들어 본 말입니다.


가랑비가 내린다. 보슬비가 내린다. 이슬비라고 해야 할까? 얼굴에 수분 공급을 위해 뿌리는 ‘미스트’가 하늘에서 내린다. 기분 좋게 촉촉하다. 부직포 화분 고추에게도 수분 공급을 해준다.


고춧잎에 물기가 어리었다. 작은 빗방울이 모여 늘씬하게 늘어뜨린 초록 잎에 얼룩얼룩 빗방울 점을 만들었다. 땡땡이, 도트, 물방울무늬. 물방울무늬하면 하얀 바탕에 까만 점이 떠오르는데 초록 바탕에 투명 물방울 색이 진짜 물방울무늬의 원조였던 건 아니었을까? 잎으로부터 볼록 올라온 물방울은 원형이 아니다. 고춧잎의 굴곡과 잎맥에 따라 무작위로 모양을 만들었다. 모양이 어그러져 있다고 그것을 물방울무늬라 못할 이유가 없다. 뽁뽁이 포장재처럼 누르면 공기 방울이 톡 터질 것 같다.


잎은 조심스럽게 물방울을 아기 다루 듯하며 슬며시 한들거렸다. 바람이 부는데 안 움직일 수는 없었다. 물방울의 무게를 지탱하며 고춧잎이 덜렁덜렁 춤을 추었다. ​​투명 우산 빗면으로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던 아이. 비를 좋아하던 달복이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우중충한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됐었지. ​

가랑비는 오락가락했다. 빗방울이 금세 날아갔다. 날아갔는지 떨어졌는지 모를 일이다. 새로 나오는 연둣빛 새싹은 물방울을 다 마신 것 같이 눈부시다. 구김살 없이 파릇하다.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 있다. 조금 더 큰 잎은 빗방울을 또르르 아래로 굴렸다. 조금 연세 지긋한 짙은 초록색 잎은 빗방울과 조금 더 어울리고 싶은지 뾰족한 잎새 끝자락을 안쪽으로 말아 빗물을 막았다. 살짝 고인 빗물, 이제는 봉긋 방울진 물방울이 아닌 물방울이 모여 고인 물이 되었다. 그저 말라서 쪼그라 들어서 안쪽으로 말려 올라갔을까? 아니면 필요한 물 담을 그릇을 만들기 위해 올라갔을까?

물이 없으면 식물이 쪼그라드는 게 정상이라지만 뿌리와 제일 가까이 있는 나이 든 잎부터 마르는 것도 신기하고 나이 든 잎의 물을 모으는 지혜도 신통방통할 뿐이다. 모은 물을 잎으로 마시는 걸까? 맞다, 식물은 뿌리를 통해 대부분 물을 마시지만 잎의 기공을 통해서도 수분을 흡수한단다. 똑똑한 식물이다. 가끔 이파리에도 물을 뿌려 줘야겠다.

가랑비가 내리니 고추가 좋다고 했다. 고추가 좋으니 나도 좋았다. 식물은 말을 못 하는데도 자꾸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그 아이의 기분이 나에게도 옮겨온다. 내 기분을 고추에게 전했다가 내가 가져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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