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재배기, 십년 묵은 캡슐커피 기계
거실에 새로운 물건들이 들어옵니다. 남편의 물건입니다. 수경재배기 2개가 들어왔습니다. 들어올 공간이 있었을까요? 과연 공간은 마술사입니다. 치우면 나오는 게 공간입니다.
소파 옆 작은 모서리 탁자에는 원두 가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주말에 가끔 우리의 커피를 책임지는 기계였지요. 남편은 과감히 그라인더를 치웠습니다. 커피는 그냥 드립 백으로 마시려나 했습니다. 애정하는 커피 기계를 치우고 그 자리에 수경재배기 하나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남편의 책상 위에 놓았습니다. 남편의 책상은 현관의 길이만큼이나 넓습니다. 공간 활용이 잘 안 되는 곳이지만 벽 쪽으로 식물재배기를 놓으니 딱입니다.
이제부터 남편의 목표는 키우기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표는 치우기입니다. 어제 남편은 솟아 올라온 새싹을 잘라주었습니다. 솎아내기 신공을 펼치기 위해 장비가 필요했지요. 가위를 약통에서 꺼내와 썼습니다. 그 가위는 어쨌는지 모르지만 약통은 바닥에 그냥 둡니다. 목적이 끝나면 남겨진 물건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자 이제 커피 기계를 하나 치웠으니 허전합니다. 제 마음은 하나도 안 허전합니다. 남편의 마음입니다. 허전한 마음에 커피 기계를 하나 더 가지고 들어옵니다. 남편은 우리 신혼 때 쓰던 커피 기계를 어디 구석에서 찾아냈습니다. 캡슐 커피 기계입니다. 대체 언제 적 기계입니까! 십몇 년 된 기계가 작동을 할까요? 작동이 잘됩니다. 내부 세척을 합니다. 물을 계속 빼고 빼고 뺍니다.
어제 캡슐 커피가 택배로 왔습니다. 오랜만에 보니 귀엽습니다. 앞으로 우리 가게 블랜딩 원두를 넣어 자체 제작해 쓸 예정이라고 합니다. 실링기와 빈 캡슐이 속속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어젯밤 남편은 캡슐커피 기계와 캡슐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수경재배기가 차지한 자리는 확보했으나 커피 기계 놓을만한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간이 누굽니까, 마술사 아닙니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남편은 주방의 작은 모서리 탁자 위에 커피 기계를 놔봅니다. 당근 표 무료 찜기를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찜기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군요. 한 달이 채 안 되었습니다.) 탁자가 바닥에 고정이 안 되어 있어 불안합니다. 더 돌아보며 자리를 물색합니다.
이제는 제 책장을 기웃거립니다. 책장 한 칸은 벌써 예전에 남편의 손아귀에 넘어갔습니다. 아이들 핸드폰을 충전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가물가물합니다.
콘센트가 있는 곳에 심지어 책장에 구멍을 뚫어 콘센트를 돌출시켜 놓았습니다. 안 쓰는 물건 몇 가지가 차지하고 있었지요. 물건들을 바닥에(!) 차분히 내려놓고
남편 님은 우선 커피 기계의 전원을 연결합니다. 책장 한 칸의 크기와 캡슐커피 기계의 크기가 딱 맞춤입니다. 그렇게 남편의 기계가 하나 더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 늦은 밤에 커피 두 잔을 뽑아 아이들과 남편은 시음을 했습니다. 물과 커피를 같이 뽑는 것보다 커피를 조금 뽑고 물을 뽑는 게 맛있다는 의견을 나눕니다.
남겨진 바닥의 물건은 아침까지 그대로입니다. 저는 또 다른 마법을 펼쳐 바닥에 버려진 물건의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합니다. 공간이 마술사인지 제가 마법사인지
헷갈립니다. 책은 꽂으면 되고... 마카 80색과 세안제 등... 남편이 바닥에 내려둔 찜기도 여전히 바닥에 내려와 있습니다.
공존하는 공간 거실에서 우리는 땅따먹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땅은 자꾸 좁아지는데 물건은 자꾸 들어옵니다. 저는 맹세코 어제 아무것도 안 들고 들어왔습니다. 먹을 것을 빼고는 아무것도.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제가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들의 수납 자리는 대부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먹을 것은 냉장고, 그릇은 주방 수납장, 빨래는 세탁실... 남편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의 자리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남편이 계속 새로운 물건을 들여오는 게 문제이지요. 그리고 가지고 들어온 물건은 웬만해선 안 나갑니다.
안 나갑니다! 그라인더도 어디로 갔나 둘러보니 그의 책상 아래 의자 옆에 그냥 있습니다. 피아노 책상 아래 현관 앞에도 하나 있지요. 그건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여보! 좀 창고로 날라요! 남편은 금방 있었는데... 이미 밭으로 날랐습니다.
남편은 그 기계들을 자신의 물건이라고 절대 생각 안 합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물건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생각은 공간보다 더 제약이 없습니다. 하하.
<거실에 살다> 블로그 발행글입니다. 거실 청소를 위한 약속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