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농부 님 심장이 뛴다. 최대 190 bpm. 약을 먹고 한잠 잤다. 비몽사몽 두 잠을 잤다. 한참을 쉬다 보니 밭에 나갈까 말까 고민된다. 밖은 위험하다. 태양이 내리쬔다. 혼자 밭에 나간 남편이 걱정된다. 31.2도씨. 시계를 차고 나갔다가 심박수가 올라가면 다시 들어올까. 남편은 6시에 나가서 감감무소식이다. 가끔 아이들이 물을 가지고 나가서 생명수를 아빠 입에 퍼붓고 들어온다. 남편은 밥 먹을 때만 잠깐 얼굴을 비춘다. 얼굴이 벌겋다. 그러곤 곧 사라진다. 어디에 있는지 거실에서 다 보인다. 나는 방에 누워서 남편의 안부를 아이들에게 물었다. 더우면 들어올 일이지. 일요일 하루 일하니 몰아서 열심히 한다. 6월의 더위가 이렇게 거센데.
그럼 나도 남편 따라 나가볼까. 정오의 태양은 마른 흙을 향해 무섭게 이글거리며 내리 꽂힌다. 호미를 들고 장화를 터벅거리며 밭으로 들어가는 나를 남편이 돌려세웠다. 더워도 너무 덥단다. 숨을 못 쉬겠단다. 나가면 안 된단다. 흙 한 번 밟아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나간 시간은 4시가 넘어 5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이었다. 해가 길어져 저녁이라는 느낌은 없는 태양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해가 넘어갈 준비를 하는가 보았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얇은 한 겹 천으로 두른 팔뚝을 시원하게 훑고 지나간다. 쪼그리 의자를 차고앉았다. 내가 할 일이야 뻔하다. 생강밭 김매기. 종일 잠을 자서 그런가 팔에 힘이 없다. 그래도 남편이 새로 산 농기구가 꽤 쓸만해 기분이 좋다. 가볍다. 바랭이 풀뿌리를 잘도 끊어준다. 낮보다 짧은 길이의 두꺼운 ‘기역’ 자 날은 안쪽으로 날카로운 것이 아닌 바깥쪽이 날카롭다. 남편이 안 쪽도 날을 갈아 낫처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왼손으로 풀 머리를 잡고 새로운 농기구를 낫처럼 들고 바랭이 풀의 뿌리를 향해 땅 속으로 날을 집어넣고 석석 흙을 자른다. 바랭이 풀 전용 낫 같다. 그럼 ’ 바랭이 풀 전용 낫‘이라고 부르자.
차양막을 안 해 생강의 여린 순이 많이도 말라죽었다.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새 순을 키우고 있는 생강을 피해 바랭이 풀을 제거하려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어디에서 생강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와중에 날이 옆으로 넓은 호미를 들고 풀을 매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 바랭이 풀 전용 낫‘을 살짝 빗겨들어 흙과 바랭이 풀뿌리만을 가르니, 가끔 생가을 감싸며 자라는 바랭이를 제외하고는 생강을 노출시키는 빈도가 현저히 줄었다. 하하하. 나는 김매기 여신이다! 시작은 좋았으나, 바랭이는 여신을 능가하는 풀의 신이다.
한여름 바랭이를 잡아당겨보지 않았다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바랭이는 안 심었는데 바랭이 난다. 콩 뽑으면 안 난다. 팥 뽑으면 안 난다. 바랭이는 뽑아도 뽑아도 또 난다. 씨를 안 뿌려도 다음 해에 또 난다. 땅 위에 뽑아 놨던 다 마른 풀뿌리에서도 2주가 되니 생명이 움트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한 줌 흙이 아니라 한 톨의 흙이라도 있다면 새싹을 틔울 수 있는 것일까. 지독한 풀 같으니. 그나마 2주밖에 안 되어, 해가 너무 뜨거워, 물이 너무 없어서 바랭이 뿌리가 한 뼘 건너뛰지 못했고 풀뿌리가 많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여보 풀이 너무 금방 자라.”
“힘든데 이제 그 줄만 하고 그만해.”
남편의 자상한 말에 마지막 줄 끝까지 힘을 내서 풀을 맸다. 그런데 이 남자 안 들어간다. 참깨 모종을 들고 온다. 참깨 모종 4판을 같이 심고 깜깜해지는 시간 집으로 들어왔다.
극한 직업 체험을 하고 싶다면 일요일의 농부를 지원하라. 특별히 해가 뜨거운 여름날을 추천한다. 해가 무지하게 길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 모기가 마실 나오는 시간까지 쭈욱 일할 수 있다.
일요일의 태양 아래에서 힘써 농사일을 하면, 평일 12시간 풀근무일 지라도 지붕이 있는 실내에서 일하는 것에 저절로 감사하게 된다.
고난의 시간이 끝나면 또 다른 고난의 시간이 다가온다. 고난의 시간을 견딘 자만이 지금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나는 원치도 않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바랭이라는 풀은 왜 내 앞길에 자꾸 나타나는지 나는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삶이란 생각지도 못한 하찮은 걸림돌에 걸려 당황하기도 하고 없는 답을 구할 때도 있다. 왜 나는 밭에서 쪼그리 의자에 앉아 ‘바랭이 전용 낫’과 같은 낯선 언어를 만들어가며 삶과 씨름을 하고 있는지?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쓰며 실실 웃고 있다. 삶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바랭이랑 3시간 싸우고 인생 다 산 것 같은 느낌이다. 진짜 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무료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혹시 나는 그걸 즐기는 것일까?
sunday farm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