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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상사의 승진법

by 정글

“상사의 욕심은 부하의 어깨 위에 짐이 된다.

그러나 좋은 상사는 그 짐을 덜어주는 사람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별별 상사를 다 만납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상사도 있고, 반대로 부하의 어깨에 짐만 잔뜩 얹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의 상사를 만나 잊지 못할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곳은 우체국을 관리 감독하는 부서였습니다. 같은 날에 승진한 과장 다섯이 있었데, 국장으로 승진하기 위해 경쟁했습니다. 1년에 단 한 명만 승진할 수 있었기에, 누가 먼저 승진하느냐에 따라 5년이라는 시간이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부서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과장들은 사력을 다했습니다.


매주 월요일 부서장 주관으로 간부 회의가 열렸는데, 전국 실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실적이 좋지 않으면 과장들은 질책을 받았고, 그 질책은 고스란히 부하직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과 회의가 진행될 때, 담당하는 사업 실적(예금, 보험, 우체국 쇼핑, 국제특급우편, 소포 매출 등)이 좋지 않으면 그 자리는 가시방석이었죠. 저는 국제특급우편 매출 담당이었습니다.


부서장 회의를 마치고 과장이 주관하는 회의 자리. 빨간색으로 표시된 하위 실적 직원들은 긴장합니다.


"정계장, 니는 뭐 하고 있는 거니. 실적이 왜 이 모양이냐! 관내국을 조지던지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니가? 능력이 없으면 현업으로 보직을 옮기든지, 자리에만 가만 앉아 있지 말고 현장으로 나가봐라......,"


투박하고 묵직한 경상도 사투리로 과장은 저를 호통쳤습니다. 과장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실적이 좋지 않은 원인과 대책을 보고하려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실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죠.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손을 잡았습니다. 주변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믹스커피를 타는 내 손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옥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커피든 손이 떨려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습니다. 옥상은 담배연기가 자욱했습니다. 믹스커피를 든 손이 아직도 떨렸습니다. 담배를 못 피우는 저는 커피를 마시며 검은빛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끊었던 담배 쪽으로 시선이 계속 갔습니다.



저에게도 한 줄기 기회가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감사실장이 고향 선배라 함께 근무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감사실은 사업 실적 부담에 벗어날 수 있고 승진 가점이 붙는 자리라 셀레는 마음으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연락이 온 다음 날 과장이 저를 휴게실로 불렀습니다.


과장은 말없이 담배를 붙였습니다.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더니 낮게 내 품으며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습니다.

"정계장! 감사실장이 고향 선배라지? 니 거기 희망했나?"

자신에게 허락을 받지 않아 기분이 나쁘다는 말투였습니다. 감사실은 승지가 점이 있는 부서라 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과장은 다시 담뱃불을 붙이고 연거푸 연기를 품어냈습니다. 과장은 결심이라도 한 듯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이 과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김 계장도 초짜고, 그나마 경력이 좀 있는 정계장까지 가면 나는 어떻게 과를 이끌지 걱정이다. 안 가면 안 되느냐”라고 다그쳤습니다.


소속 직원이 희망부서로 가면 축하하고 보내주면 좋으련만, 자기 욕심만 차리는 과장님이 야속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내 달라고 할 만큼 저는 배포가 크지 않았습니다.


"과장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가겠습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그 한마디로 기회는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고맙소, 그리 좀 해 주소!, 그럼 감사실장한테는 못 간다고 내가 이야기할게요!"

과장 얼굴은 금세 밝아졌습니다.


사업 부서 탈출 기회가 물 건너갔죠. 얼마 후 감사실장 직접 물었습니다. "왜 안 오려 했나? 기회를 줬는데......,"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속으로는 억울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회식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부산 남포동의 한 극장에서 단체로 '실미도' 영화를 관람한 후 횟집으로 행했습니다. 새로 온 직원 환영회 겸 과 단합을 위한 자리였죠. 건배 제의가 몇 차례 진행되고 술상 위엔 웃음과 고성이 뒤섞였습니다. 술판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옆에 있던 동료 김충식 계장이 맞은편 부하직원 태도를 문제 삼고 나무랐습니다. 저도 평소 그 직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터라 무심코 거들었습니다.


"그래, 좀 그런 것 같더라."

그 순간,

"에이 새끼들, 같이 술 못 먹겠네!" 맞은편에 있던 과장이 욕을 하며 초장을 제 얼굴에 뿌리고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붉은 초장이 안경 타고 흘러내렸고, 흰색 와이셔츠가 초장 범벅이 되었습니다. 놀라 안경을 벗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순간 횟집 밖으로 나갔던 과장이 신발을 신은 채 다시 들어와 제 넥타이를 잡고 끌었습니다. 숨이 막혀 고개를 돌리자 과장이 비틀거리며 넘어졌습니다.


직원들이 과장을 데리고 나갔고, 회식 장소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과장을 따라 나갔습니다. 부하직원을 나무라던 김 계장은 저를 위로하며 한잔 더 마시러 가자고 했습니다. 새로 전입 온 직원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왔죠. 술맛이 썼습니다. 정신이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새벽을 맞았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횟집에서 초장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한켠으로 제쳐두곤 합니다. 과장하고는 대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잘못한 것이 없는 것 같았거든요. 더구나 다음 날 아무런 일도 없는 듯 태연한 과장을 보니 말 붙이기도 싫었습니다.


'초장 사건' 후 한 달쯤 지났을 무렵, 과장은 또 저를 휴게실로 저를 불렀습니다.

"정계장! 나에게 불만이 있는 교?"

"없습니다."


사실은 '불만 있는 게 아니라 라이터(?)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내 욕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승진해서 300여 명의 직원을 둔 국장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을 떠 올리며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나는 직원 얼굴을 향해 초장을 뿌리는 그런 상사가 되지 않겠다.”


세월이 지난 지금 ‘초장 사건’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때 과장은 나와 동료 김 계장이 '부하직원 한 사람을 나무라는 게 ' 기분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말하기도 싫고 밉기만 했던 과장이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마음이 이제야 듭니다.


부서 실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그때 과장이었더라면 실적 독려를 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었을까?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습니다. 그 과장도, 나도, 다른 동료들도 모두 부서장 밑에서는 같은 '부하'였습니다. 실적이라는 무게 앞에서 흔들리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지금도 어느 술집에서 제 이름이 술자리 안주로 오르내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술안주가 돼서라도 직원들이 웃고 즐거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부하를 짓누르는 힘이 아니라,

그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 주는 힘이다.


내일 3화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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