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왜 부하직원 편만 드는가!
"함께 침묵하는 것도 값진 순간이다. 그러나 진정 멋진 일은 함께 웃는 것이다. 같은 시간, 같은 감정을 나누는 동료가 있다는 것. 그것이 직장 생활의 가장 큰 선물이다."
“저, 발령받아 왔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뱃재를 털며 “발령받은 아가 니가?” 하는 박 주임의 눈짓이 소파를 향했다. 양복이 없어 형님의 옷을 빌려 입은 몸이 더없이 불편하고 낯설었다. 엉거주춤 소파 옆에 서 있자니, 박 주임이 “안 앉고 뭐 하노?”라며 째려본다. 나는 소파에 등을 대지 않고 곧추세워 앉았다. 하나둘 출근하는 직원들이 흘끗흘끗 쳐다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한 시간쯤 흘렀까 박 주임이 종이 한 장을 탁자 위에 툭 던졌다. “이거 읽고 도장 찍어!” 종이 위에는 「공무원 선서」가 진하게 적혀 있었고, 아래에는 ‘(직급) (성명) (인)’ 적는 칸이 있었다. 성명은 알겠는데, 직급은 뭘 적어야 하나? 도장도 안 가져왔는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직급은 뭐라고 적어야 합니까? 도장을 안 가져왔습니다.”
“새끼, 임용받는 놈이 도장도 안 챙겨 왔나! 지장 찍어, 인마! 직급은 '행정서기보시보'라 적고....”
군대도 아닌데 왜 욕을 먹어야 하나 속으로 투덜거렸다.
시간이 한 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 박 주임은 나에게 눈짓하며 따라오라고 했다.
회의실로 끌려가 '공무원 선서'를 연습을 수없이 반복했다.
“선서!”
“더 크게! 새끼 군대 안 갔다 왔나? 다시!” 군대도 아닌데 왜 욕을 먹어야 하나 속상했다.
‘선서!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헌법과 법령을 준수하고 국가를 수호하며 국민에 대한 봉사자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서...’
몇 번을 반복하자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러자 박 주임은 “자동!”이라 외치며 회의실을 나갔다.
나는 큰 소리로 선서문이 외워질 때까지 연습했다. 복도를 지나가던 여직원들이 빼꼼히 문을 열고 킥킥거리며 지나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박 주임이 다시 돌아와 따라오라 손짓했다.
복도를 지나자 ‘국장실’ 팻말이 보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국장실로 들어가자 맞은편 책상 앞에 머리카락이 반쯤 벗어진 국장이 서 있었다. 그 옆으로 간부로 보이는 다섯 명이 도열해 있었다. 박 주임이 나와 국장을 번갈아 보며 “지금부터 국가공무원 임용식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선서문을 건넸다.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오전 내내 연습했던 대로 오른손을 들고 우렁차게 “선서!”를 외쳤다. 국장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중심을 잡았다. 선서문을 보지 않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약간 더듬고 말았다.
국장은 나의 눈을 보며 “박력이 있어 좋다!”라고 칭찬했다. 훈시가 길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임용식이 끝났다.
임용식을 마친 뒤 박 주임은 선서문을 챙겨 자신의 책상에 두고는, 따라오라고 했다. 도착한 곳은 하동시외버스터미널 건물 안에 있는 식당이었다. 반은 슈퍼마켓, 반은 식육점이었다. 주인은 박 주임을 잘 아는 듯 반갑게 악수했다.
“오늘 소 잡은 거 있지? 천엽하고 간 한 접시 주라!”
잠시 후 하얀 대접 두 개와 대병 소주 한 병이 나왔다. 대낮에 소주라니. 박 주임은 대접에 술을 콸콸 따랐다. ‘설마 저걸 마시라는 건 아니겠지.’ 그는 소주가 가득 담긴 대접을 나에게 건넸다. 자신도 대접에 술을 채우고 잔을 들어 내 앞으로 밀며 건배했다. “공무원 된 거 축하한다.” 나는 입술을 대접에 대어 마시는 시늉만 하고 내려놓았다.
‘퍽!’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박 주임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선배가 잔을 주는데 베어 먹어?” 그 순간 이런 조직에서 계속 근무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원 샷 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성철아! 이 새끼 오늘 발령받은 우리 10회 후배다!”
그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후배라서 처음부터 함부로 대했던 거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후배가 공무원이 되어 발령받아 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 너무 좋아서 그랬다고 했다. 긴장이 순식간에 풀렸다. 그 뒤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목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하숙집은 아니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나가보니 박 주임과 그의 부인이 아침상을 차리고 있었다. 어제 내가 정신을 잃어 그가 업고 집으로 왔다고 했다. 분명 세 명이 함께 마셨던 기억만 어렴풋이 날뿐, 그 뒤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박 주임의 아내는 재첩 국을 내 앞으로 밀며 말했다. “속 쓰릴 텐데 식사하세요.” 임용 첫날,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외박을 했다.
36년 전 패기 넘치던 공무원의 임용 첫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36년 후, 국장이 된 지금. 오늘 신규 공무원 세 명의 임용식이 있었다. 36년 전 촌닭처럼 긴장했던 내 모습이 보여 빙그레 웃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로 그들을 대했다. 임용식을 마친 뒤 신규자들과 차를 마셨다.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긴장을 풀어주려고 이름을 크게 외쳐주었다. “이소라, 이소라, 이소라, 힘!”
한 달 후 ‘국장과의 대화 워크숍’을 만들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힘든 일이 많았죠? 오늘은 여러분의 애로사항을 듣고, 하루를 쉬게 해 주고 싶어 이 자리를 마련했어요.” 워크숍 취지를 이야기했다. 모두 신규 동기라 금방 친해졌다. 마창대교가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서 식사하며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창원우편집중국과 지역 문화 탐방도 했다. 밝게 웃는 후배들을 보니 뿌듯했다.
“처음 발령받아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는데, 아까 국장님이 ‘우리를 위로하고 애로사항을 청취하며, 하루 쉬게 해 주고 싶다’는 말에 울컥했어요.”
한 여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린 자녀 셋을 두고 객지에 홀로 와 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앞의 고기 접시를 그녀 쪽으로 밀어주었다.
“많이 드세요.~”
내일 10화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