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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사무실 좀 꼽아 주세요!

세상은 왜 부하직원 편만 드는가!

by 정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금의 나는 많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의 결과다.”

1985년 10월. 입사한 지 3일째.

매일 아침 9시 30분까지 면 지역 우체국 실적을 집계하여 상부기관에 보고해야 했다. 선임에게 보고서 작성 방법을 배우고 관내 전화 리스트를 들여다보며 전화를 걸었다.


당시에는 면 지역 대표번호를 누르면 교환원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하동국 정인구입니다. 사무실 좀 꼽아주세요!”


이때부터 교환원이 장난기가 시작되었다.

“살살 꼽을까요? 매매 꼽을까요? 고향은 어딘데요? 애인은 있어요? 몇 살이에요…?”

급해 죽겠는데, 사무실에 연결하지 않고 꼬치꼬치 묻는다. 옆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까지 들려왔다.

“아!, 지금 빨리 실적을 집계해야 하는데, 나중에 알려드릴 테니 우선 꼽아주시면 안 될까요?”

사정을 해도 소용없었다. 처음 오면 무조건 신고식(?)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12개 면에 전화를 돌리면서 비슷한 신고식 문답을 반복해야 했다. 실적을 집계하고 나니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신고식 투어

매일 아침 업무보다 교환원들의 장난에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게 억울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직접 교환실을 방문해 신고식을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교통편이었다. 시골이라 가는 길은 되지만 오는 길은 버스가 끊겨 올 수가 없었다.

함께 갈 사람을 물색하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던 집배원 이재현에게 부탁했다. 처음에는 단칼에 거절했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들어줄 리 없었다. 궁리 끝에 “예쁜 교환원들과 술 마시고 놀 수 있다"라며 꼬드겼다. 그렇게 우리의 신고식 투어가 시작됐다.


교환실의 풍경

비포장도로를 달려 도착한 면 지역 우체국 2층. 생전 처음 보는 교환실은 신기한 세상이었다. 교환기 여러 대가 놓여 있고, 교환원 네 명이 근무 중이었다. 두 명은 교환대 앞에 앉아 손놀림을 바쁘게 움직였고, 두 명은 우리를 맞아 안내했다. 전화 시스템에 관해 열을 올리며 설명했다.

“전화 코드를 다 꼽지 않고 반쯤 걸쳐놓으면 상대 통화를 다 들을 수 있어요. 누가 누구랑 연애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죠. 전화가 길면 대부분 애인 사이예요.”

불법인 줄 알면서도 태연하게 들려주는 꿀팁(?)에 신기하기만 했다. 정주사가 전화를 걸어 “사무실 좀 꼽아달라"라고 하면 이렇게 한다며, 교환기의 한쪽 코드를 뽑아 노란색 표시가 된 ‘사무실’ 구멍을 가리키며 꽂는 시늉을 했다. 그 구멍은 페인트칠이 벗겨져 반들반들했다.

술자리와 고스톱

설명을 마친 후 우리를 인근 식당으로 안내했다. 저녁식사 겸 술을 마셨다. 교환원 둘 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술이 몇 순배 돌고 격이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이영숙 교환원이 “앞으로 누나라 부르라"라고 했다. 식당 한쪽 곁에서 고스톱판이 벌어졌다. 그녀들의 솜씨는 타짜 수준이었다. 나는 가는 곳마다 돈을 잃었다.

신고식을 마친 우체국은 사무실로 바로 연결됐다. 업무 속도는 단축되었다. 업무 외적인 부탁도 척척 해결해 주었다. 교환원은 그 지역의 마당발이었다.

초복 날의 사고

초복 날이었다. 아침 실적 집계 시 섭외된 횡천 우체국으로 향했다. 이재하 집배원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약속 장소인 삼계탕집으로 갔다. 술잔이 돌고 분위기가 좋았다. 평소 술을 잘 못 마시던 함께 간 동료도 분위기에 취해 연거푸 마셨다.

집으로 돌아올 때, 그에게 운전하는 걸 말렸지만 괜찮다며 오토바이를 몰았다. 칠흑 같은 어둠, 논에서는 개구리 소리가 자장가처럼 울려 퍼졌다. 졸음이 쏟아질 때쯤, 갑자기 허공을 나는 듯한 기분과 함께 곤두박질쳤다. ‘쫘악! 철벅!’ 온몸에 진흙이 묻고 풀잎이 손에 잡혔다. 논바닥에 떨어진 것이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다. 엉금엉금 언덕을 한참 기어 도로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오토바이를 찾으러 가 보니, 6미터쯤 되어 보이는 논바닥에 오토바이가 처박혀 있었다. 천운이었다. 논의 물과 흙이 완충재가 되어 준 덕분이었다.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교환원 업무는 한국 전기통신공사 발족과 함께 우체국에서 분리되었다. 그때의 신고식, 장난기 섞인 목소리, 술자리 그리고 위험했던 사고. 모두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다섯 번째 ‘유리 징검다리’ 통과 미션이 있다. 이미 강화유리가 아닌 유리를 밟아 추락한 곳은 밟지 않고 건널 수 있다. 앞선 사람 희생이 뒤따르는 사람 생존을 보장한다. 나 또한 수많은 직원들 희생과 헌신 덕분에 국장이 될 수 있었다.


나는 후배들에 가는 길에 강화유리가 아닌 깨어진 유리였다. 장난기 있고 짓궂게 굴었지만 정이 많고 따뜻한 누나 같은 교환원처럼 직원들을 대하지 않고 내 욕심만을 채웠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내 힘이 아니라, 선배와 동료 그리고 후배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나 혼자 빛난 적이 없다. 언제나 곁의 사람들이 나를 비추어 주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한 번씩 이유없이 기분이 칙칙해 질 때가 있다. 직원들이 밉고 서운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한 번 씩 1985년 10월을 떠올리곤 한다.


"사무실 좀 꼽아 주세요!"

"살살 꼽을까요? 매매 꼽을까요?......, "


오늘은 장난기 어린 교환원 목소리가 더 그립다.


내일 11화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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