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어쩌다 승진

세상은 왜 부하직운 편만 드는가!

by 정글

24세에 9급 공무원이 됐다. 임용되던 날 선임자가 말했다. "와, 너는 40대에 서기관(4급) 무조건 달겠다." 젊은 나이에 입사한 나에게 기대가 컸다. 나 역시 그럴 줄 알았다. 8급, 7급, 6급까지 남들보다 빨리 승진했다.

어쩌다승진_고난역경_극복_자기계발_성장_변화_리더십_갑질_책쓰기글쓰기 (2).jpg

내 별명은 '꾀돌이'였다. 아이디어맨으로 통했다. 업무 제안이 채택되어 장관 표창을 2번 받고, 보상으로 2호봉 올랐다. 공무원 중앙제안에서 대통령 상을 수상해 '행정사무관(5급) 특별승진' 대상이 됐다. 국무총리 표창, 장관 표창 6개, 최우수 직원에게 주는 <자랑스러운 우정 인재상> 대상까지. 상복이 터졌다. 승진심사자가 좋아할 만한 스펙이다.


10월, 1년에 한 번 있는 승진심사가 있는 달이었다. 업무 기술서(승진 대상자 업적을 사내 게시판게 공유, 사실 여부 검증)가 게시되자 몇몇 동료에게 '미리 승진 축하한다'라는 축하 인사를 받았다. 나는 입꼬리가 한없이 위로 올라갔다. 대통령상 수상자는 특별승진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먼저 수상한 사람은 모두 승진했었다. 표정 관리하면서 발표날만 기다렸다.

어쩌다승진_고난역경_극복_자기계발_성장_변화_리더십_갑질_책쓰기글쓰기 (3).jpg

드디어 승진 발표날 출근길. 교통사고로 차가 정체되어 사무실에 늦게 도착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승진 발표 문서를 기다리며 사내 업무시스템 '도착 문서접수란'을 수시로 열었다. 시간은 더디 갔다. 퇴근시각이 30분 지났을 무렵, "와, 사무관 승진 발표 났다!" 동료 직원이 소리쳤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는 눈을 피했다.


승진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동료들의 시선을 피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회사 옥상으로 올라가는 데 다리가 휘청거렸다. '내가 뭘 잘못했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시멘트 바닥에 물에 젖어 붙어있는 낙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과장이다.

어쩌다승진_고난역경_극복_자기계발_성장_변화_리더십_갑질_책쓰기글쓰기 (5).jpg

사무실로 돌아와 과장 책상 앞에 갔다. "정 팀장, 어쩌나. 내년에 또 기회 있으니까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 직원들이 권하는 술잔을 받고 단숨에 들이켰다. 술맛이 맹물 같았다. 위로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축하가 아닌 '위로 주'는 나도 동료도 힘들다. 혼자 있고 싶어 밖으로 빠져나왔다.


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후배에게 전화했다. "팀장님, 마음 아프지 예~ 일반 승진자와 비교해서 경력 갭이 4년 넘게 차이 나서 올해 제안 입상자는 승진에서 제외됐어요." 왜 하필 올해란 말인가! 후배 말이 수긍되지 않았다. 회사를 원망하며 밤새 술을 마셨다.

어쩌다승진_좌절책쓰기_선물_나눔_배움_리더십_우체국대면보고 책쓰기_자전적글쓰기_뱐화와 성장.jpg

그 후로 3년이 더 흘렀다. 해마다 특별승진 대상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갔지만, 매번 탈락했다. 승진 조건은 다 갖췄다고 생각했다. 대통령 표창도 받고, 장관 표창도 6개나 받았다. 업무만으로는 부족한가 싶어 토·일요일에는 상사를 모시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다녔다. 청장 관사에서 잡다한 시중도 들었다. 딸 병원 진료에도 동행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승진은 안 됐다.


내 입에서는 짜증, 불평불만, 원망, 회사 욕, 상사 욕이 일상이 됐다. 별명은 '꾀돌이'에서 '투덜이'로 바뀌었다. 불평불만 많은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이 하나둘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술병만 늘어갔다. 어느새 가을이 싫어졌다. 떨어지는 낙엽이 내 신세 같았다.

어쩌다승진_좌절책쓰기_선물_나눔_배움_리더십_우체국대면보고 책쓰기_자전적글쓰기_뱐화와 성장 (1).jpg

5년째 되던 해 가을. 퇴근시각 즈음 승진 발표가 났다. 승진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6급 팀장에서 5급 사무관 승진까지 14년이 걸렸다.


승진 후 영업과장으로 발령받았다. 남은 삶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술을 끊고 책을 읽으며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자기 계발을 시작했다. 이후 국장으로 보직 승진했다. 동료와 주변 지인들에게 부산에서 서울로 오가며 배운 내용을 나누는 일에 집중했다.


어느 날, 후배 K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국장님, 저... 또 승진에서 떨어졌어요. 3년째예요. 제가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의 얼굴에서 예전의 나를 봤다. 억지 미소, 불안한 눈빛, 초조함. 그가 쥐고 있던 커피 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다승진_고난역경_극복_자기계발_성장_변화_리더십_갑질_책쓰기글쓰기 (6).jpg

나는 그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줬다. 14년 동안 승진만 바라보며 얼마나 불행했는지, 사람들을 피했고, 술로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후배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고 공감해 줬다. 조언할 처지도 아니었다. 자기 계발을 하며 배운 것을 나누고 즐기며 의미 있게 보내고 있다는 나의 이야기만 전했다.


후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누군가 그렇게 말해줬어도 '뭔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까. 몇 달 후, 그 후배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표정이 달랐다. "국장님, 요즘 후배들 가르치는 게 재밌어요. 승진은... 글쎄요,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그도 책을 읽으며 자기 계발을 시작했다고 했다.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어깨도 펴져 있었다.


S 우체국에 근무할 때였다. 영업과장이 급히 국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숨을 고르던 과장이 말했다. "국장님, 서기관으로 특별승진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믿기지 않아 본청 인사부서에 문의하고서야 믿었다. 최단기간 5년 만의 승진. 그것도 본부나 본청이 아닌 우체국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승진은 애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승진만을 바라보며 내 성과에만 집착했을 때는 오히려 멀어졌다. 화려한 스펙을 과시하며 교만했고, 나만 생각하는 불평불만 덩어리였다.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닌 '우리'였다.

어쩌다승진_고난역경_극복_자기계발_성장_변화_리더십_갑질_책쓰기글쓰기 (7).jpg

동료들을 돕고, 서로 소통하고, 계속 공부하고, 배운 것을 나누는 삶을 살다 보니 나도 성장하고 동료도 성장하고 조직도 성장했다. '남을 돕는 인생'으로 마음을 바꾸자 신나고 좋은 일만 넘쳤다. 어쩌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승진해 있었다.


같은 해 '5급 승진 명단'에 후배 K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살아보니 정말 중요한 건 명함에 박힌 직급이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설레는 마음, 동료와 함께 성장하는 기쁨,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 그것이 진짜 승진이었다. '어쩌다 승진'은 그렇게 찾아왔다.


내일 37화.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