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
8년 전 술을 끊으면서 TV도 함께 끊었다. 술 끊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TV까지 멀리하니 삶이 한결 단순해졌다. 그렇게 드라마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지냈다.
매주 수요일은 2시간 글쓰기 수업을 듣는다. 오늘은 수업이 없어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저녁을 먹고 배를 퉁퉁 두드리며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그만 넷플릭스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첫 화면에 뜬 '남자친구'. 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16부작 드라마였다. 드라마에 빠져 그만 밤을 꼬박 새우고야 말았다.
잔잔했다. 요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잔잔함 속에 로맨스의 달달함과 설렘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여자 주인공 차수현(송혜교)은 정치인 아버지를 둔 동화호텔 대표다. 그녀는 태경그룹의 며느리였다. 호텔은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받았다. 근데 조건이 있다. 계약서 3조 4항에는 차수현이 명예를 실추시킬 경우 호텔에 관한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이 두고두고 차수현의 발목을 잡는다.
차수현의 아버지는 국회의원으로 대통령을 꿈꾸고 있다. 대기업과 정치인의 두 집안의 결합인 셈이다. 한 번도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 여자.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그런 그녀 앞에 김진혁(박보검)이 나타난다. 동화호텔의 평범한 사원이지만, 자유롭고 맑은 영혼을 가진 청년이다. 쿠바에서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현실로 돌아와서도 이어진다. 나이도, 신분도, 처한 상황도 다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이란 결국 이런 게 아닐까.
대기업의 며느리였고, 대선 후보로 유력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신을 잃고 살아가던 차수현이 자유로운 영혼 김진혁을 통해 밝은 내면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다행히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김진혁(박보검)이 문학소년이어서 그런지 곳곳에 주옥같은 대화와 책 읽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가 좋아했던 나태주의 시 '그리움'처럼, 이 드라마도 내게 오래 그리운 무언가를 남겼다.
김진혁이 좋아하는 시 나태주 시인의 그리움이다.
그리움 - 나태주
가지 말라는데 가고 깊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
어쩐지 주인공 두 사람의 마음을 보는 듯했다.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 실려있다.
드라마 대사 중 일부.
"음악이 너무 좋아서, 잠이 깼어요.
라디오에서 우리 같이 들었던 음악이 나오더라구요. "
"국물은 여기가 더 좋네요."
"있잖아요 대표님, 우리는 무슨 사이가 맞을까요?"
"우리는, 김진혁씨랑 나는......, 상사와 직원이죠.
"저도 오는 내내 생각해 봤어요.
회사 대표님한테 이렇게까지 할 일이냐.
나름 책임감 있게 자랐고,
군대도 갔다 와서 철부지는 아닌데..
왜 달려갈까? 우리 사이가 좀 애매하더라구요."
"김진혁씨, 우리라는 표현은 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보고 싶어서!"
16부작 속에는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리움, 사랑, 공감하는 법, 직장에서 인간관계, 친구사이, 인내, 욕망.....,
진짜 행복은 부나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나에 대한 그리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다.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회가 진행될수록 내 마음이 그리움으로 꽉 찼다.
7년 전 시청률 10%를 넘는 인기 드라마였다고 한다. 그동안 TV를 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이었기에 더 깊이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삶을 살려고 술도 끊고 TV도 끊었는데, 나는 예전보다 더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드라마 한 편 볼 시간도 없이.
한동안 잠을 설쳐가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때로는 잠시 멈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내 주장이 옳다고 고집만 하고 있지 않은지, 나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은 없는지.......,
나태주 시인처럼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뭔지 모를 따뜻하고 뭉클한 그리움이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책을 통해, 드라마를 통해, 다른 사람 속에 비친 내 모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만나간다. 그 만남이 누군가에게 그리운 존재로 남길 소망하면서.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