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문 앞에 소포 박스가 있었어요.
발신인, 독서모임 J 선배였습니다.
박스 안은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한쪽에는 '호박고구마',
다른 한쪽에는 '밤고구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마치 짬뽕 반, 짜장 반처럼
두 종류를 함께 즐기라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고구마를 골라 삶아 먹었습니다.
밤처럼 폭신하고 달콤한 맛,
물컹하고 달달한 호박 맛,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삶아 먹다 보니
금세 박스는 바닥을 드러냈고,
고구마 네 개만 남았습니다.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안개비 내리는 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마루에서
고구마 줄기를 자르고 계셨습니다.
"인구야, 엄마랑 밭에 고구마
심으러 안 갈래?"
"어. 어~, 갈게요."
친구 집에 놀러 가고 싶었지만
어느새 대답해 버렸습니다.
밭이랑에 호미로 흙을 파서
고구마 줄기를 심었습니다.
처음엔 줄기만 건네주던 제게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도 해봐. 이랑 남쪽에
심어야 햇볕을 잘 받을 수 있어."
"네, 알았어요."
여름이 되자 밭은 고구마
줄기로 가득 차서 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낙엽이 지기 시작할 무렵
고구마를 수확했습니다.
줄기를 걷어내니 주렁주렁 달린
고구마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부엌 앞에 구덩이를 파서
고구마를 저장해두고 겨우내
구워 먹고 삶아 먹던 기억이 납니다.
박스 안에 있는 남은 고구마 중
하나를 꺼내 물병에 담가
방구석에 두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라 고구마
줄기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 일주일쯤 후 방
청소를 하다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새 고구마에서 순이 올라와 있었고,
병 속에는 하얀 뿌리가
가느라 한 실처럼 뻗어 있었습니다.
“여보, 이 줄기 좀 봐 신기하재?”
물병을 들고 거실 아내에게 보여줬습니다.
학교 다닐 때 점수 100점 맞아
엄마에게 자랑할 때처럼 말이죠.
"어~ 진짜네 신기하다!"
아내 표정이 금세 밝아졌습니다.
구석지에 있던 고구마는
책상 위로 올라왔습니다.
승진을 한 셈이지요.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쳐다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오묘하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식물 속에는 고유한
DNA가 담겨 있습니다.
양파는 양파대로, 고구마는 고구마대로
자신의 본질을 따릅니다.
겨울에 잎을 다 떨어뜨린 가로수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새순을 틔웁니다.
그 어떤 식물도 자신의 정체성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태어날 때부터
고유한 DNA를 지닌 존재입니다.
80억 세계 인구 중 유일무이한
존재가 바로 '나'입니다.
자신을 믿고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종종
잊고 삽니다.
밤고구마는 밤고구마대로,
호박 고구마는 호박 고구마 대로
서로 비교하지 않지요.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뿌리를 내리고 새순을 돋웁니다.
고구마 새순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지금 내 길을 가라고!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너 자신을 믿으라고!
고구마 뿌리와 새순처럼
아름답게 꿈을 이뤄 가라고!
어머니는 죽어서도 내 삶의 남쪽에서
여전히 빛을 보내주고 있은 사실을
잊고 살았습니다.
J 선배! 감사해요. 오늘도 내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