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이 뭐라고.

전직 은행원이지만 지금은 그냥 저입니다.

by 오늘의 바다 보다

퇴사도 유행이라, 여기저기서 퇴사가 보인다. 물어 보살에도 유퀴즈에도, 유튜브의 각종 영상들에도 퇴사가 가득하다. 그런데 다들 '공무원 퇴사', '대기업 퇴사'라고 떡하니 자신이 버리거나 놓친 회사를 맨 앞에 적어두는 게 그냥 그래 보였다. 그래서 전직 은행원이라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니, 그것도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을 퇴사했으니 전직 은행원이지 뭐란 말인가. 나의 현재와 과거는 연결되어 있고, 은행원이었던 시절은 적어도 나 스스로에게는 자랑스러운 졸업장이 맞다.


내가 뭐라고 있는 것도 안 팔 것인가. 없는 것도 만들어 팔아야 하는 마당에.


이제 글의 셀링포인트로 대놓고 걸어본다.

"전직 은행원의 퇴사일기" - 은행원 10년 차 억대 연봉을 버리고 퇴사한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제 글을 구독하시고 읽어주시길. (아.. 힘들다)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이름을 아는 증권사와 은행에 모조리 입사지원서를 넣었다. 그중에 나를 뽑아주는 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생각한 것과 다른 직업이라는 것을,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박차고 나갈 돈도 용기도 없었다. 하나하나 배우고 참아가며 버텼다.


보통 은행에 들어가면 모출납이라는 업무부터 시작한다. 지점의 모든 돈을 관리하고 세고 맞추는 일. 아침이 되면 모든 직원과 자동화기기에 하루에 일용할 현찰을 나눠주고 저녁이 되면 모조리 거두어 하나하나 세어 금고에 넣었다. 금융센터라 지점의 규모가 커서 자동화기기도 10대가 넘고 직원도 그 이상이었다. 뭐, 하루 종일 기계와 씨름하고, 맞지 않는 돈의 액수와 씨름하는 고달픔은 사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다. 불편한 치마 유니폼을 입은 채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기계와 창구를 오가는데, 자리를 자주 비운다고 혼내던 과장님도 이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처음 보는 나에게 이유 없이 공격적이었던 몇몇 손님들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서비스업은 감정소비업이라는 뜻이다.


지점 근무를 피하면 나아질 줄 알았다. 기업금융을 하는 센터에 가고, 각종 요건들을 채워 승진을 하고 본사에 가서도 여전히 은행은 나에게 맞지 않는 직장이었다. 이상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적당히 외향적이고, 적당히 일도 해내는 중인데 나 혼자만 늘 불만족 상태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은행원이 맞지 않는 게 아니라 회사생활 자체가 싫었던 것 같다. 뭐 회사가 좋은 사람 누가 있겠냐만은 나는 특히 혼자서 인생의 의미를 자주 곱씹어보는 사람이었고,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겠으나 결혼도 안 한 싱글이라 억지로 참고 일할 이유가 부족했다.


일이 맞지 않아도, 참고 다닐 다른 이유가 사실 존재하긴 했다.


일단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다닌다는 사실이 나에게 만족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위 '회사 뽕'이라는 것은 유효기간이 3년 정도였다. 취업에 성공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은 이미 내가 가진 것이므로 빠르게 소멸되었다. 이내 건물주나 사장이 아닌 이상 직장인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금전적인 보상은 대부분의 고통을 상쇄한다. 물론 은행도 처음부터 돈을 많이 주는 것은 아니다. 대리급 이상부터 연봉그래프가 가파르게 올라가서, 매달의 월급이 신용카드 대금을 넉넉히 내고도 남는 수준이 된다. 8년 차 즈음에는 최고 연봉으로 세전 1억 2천이 명세서에 찍혔다. 당연히 나에개 그것은 충분한 보상이었다. 만약 나에게 건사해야 하는 아이가 있었다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촐한 1인 가정이었고, 연봉이 올라가도 별로 사고 싶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돈이라는 것을 처음 가용하는 맛에 취해 카드를 자유롭게 굴리던 신입사원 때 보다 더 쓰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 이제 나에게 하기 싫은 일을 참고할 이유가 더 이상 없다. 거기에 좀 자립적이고 주도적인 성격이 더해지니 이제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35세에 나는 은행을 졸업했다.


만 40이 되기 전에 퇴사해서, 희망퇴직 대상도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퇴직금을 받고 나온 후 이제 3년이 지나간다. 돌이켜 생각해도 은행이 뭐라고, 그걸 두고 온 게 아쉽지 않다. 수많은 직업 중에 하나일 뿐인 은행원. 30대에 퇴사하던 50대에 퇴사하던 퇴사하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벌써 그곳에서 일하던 감각과 각종 업무지식들이 희미하게 녹아버렸다.


나를 한 순간 뿌듯하게 만들어 주던, 그 이름과 그 월급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회사의 것이었다. 나오고 나면 부가가치를 창출할 어떤 수단도 내 손에는 없다. 이제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만의 독창적인 콘텐츠를 거머쥔 사람이 가장 부럽다. 회사에서 잘려도, 사업이 망해도, 세상 모든 것이 AI에 대체된다 해도, 오롯이 남을 나만의 그 한 가지. 아무리 작더라도, 이제 그 하나를 찾아 소중히 키워나가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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