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무쌍 길들여지지 않는...

있잖아, 사실은 말이야~

by 유월 토끼


굿모닝 지니!

무탈한 밤을 보내고 돌아왔나요.

야간근무를 하고 들어와 잠든 당신에게 눈인사하고 돌아서 보여주지 않을 편지를 써요.


사람은 태어난 순서대로 질서 있게 살아가지만 가는 길은 순서가 없다며 다닐 수 있을 때 세상 구경하며 놀아주어야 한다는 철학을 삶의 기둥으로 세워두고, 야간 근후 마치고 돌아오면 피곤할 텐데도 '가자! 출발! GO GO!' 외치며 긴급하게 짐을 싸게 했던 당신.

긴 시간 그 억지스러운 철학과 수많은 유혹거리를 준비해 나를 설득시키고 짐을 싸게 해 길을 나섰던 당신 덕에 아주 좋은 추억들을 차곡차곡 많이도 쌓아왔네요.


어떻게 찾았는지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에 자리하고 앉아 이웃들과 지인들과 가족들과 잔을 기울이며 밤하늘의 별이 가득 차고, 달이 중천을 넘어가는데도 이야기 꽃을 심고 심어 꽃밭이 될 때까지 자리를 지켜내는 당신의 대용량 에너지가 늘 부럽고 무서웠네요.

바테리 용량이 부족한 나는 아이들 핑계로 먼저 들어가거나 옆에서 감긴 눈으로 귀만 살짝 열어 '들어가자'는 말이 스치는 순간만 기다렸었는데...

어느새 중년이 시작되고 지금 당신의 에너지도 자주 충전이 필요한때가 온 것 같아요.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바테리의 총량이 비슷해진 것 같죠.

요즘 당신이 조금 더 편안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만족스럽기도 하지만, 잠든 당신 모습이 짠하고, 안쓰럽고 어느 때보다 더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 자주 들어요.


어떤 자리에서든 '사실이잖아' '팩트잖아' = '맞잖아'라는 말을 좋아하는 당신 덕에 난 늘 긴장했고, 빠르게 직진하는 당신의 말과 어투가 오해를 만들까, 특히 우리 아이들에게 번역하고, 포장해야 했던 웃픈 일들이 많았어요.


어느 날 특별한 음식이나 물건을 들고 오면, 내가 올 때까지 엄마꺼니까 손대지 말라며 식탁 위에 올려두고 아이들을 애태우고 인내심을 키워내는 일도 자주 있었어요.

최우선 순위에 나를 두어 찐사랑 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순간도 많았고, 세상일에도 사람에게도 관심이 많은 당신은 이런저런 일들을 관여해 교통정리해 주고 해결해 주려 맨 앞에 서있었죠.

그런 당신이 당당하고 정의롭고 재미있는 매력을 가졌다 생각하면서도, 감정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상황에 따라 콕 집어내는 듯한, 날이 선 말의 모양이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어렵고 불편해 힘겹기도 했어요.


긴 시간 관리대상이라 생각하며 길들여 가자 하며 지냈었는데, 여전히 당신은 길들지 않은 채 그럭저럭 세상과 나와 잘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네요.


크고 작은 이벤트를 좋아하는 당신은 결혼생활 내내 나에게 아기자기한 많은 선물을 주었고, 일상에 필요한 도구와 소품들을 잘도 찾아와 새로운 문물을 만나고 사용하는 즐거움도 알려주는 재미를 주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왠지 평소 보다 더 생기 있는 모습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을 즐기고, 해결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듯 힘껏 좋아했어.

그런 당신을 보고 있으면 사랑스럽고 고맙고 또 재미있었어.


눈이 펑펑 쏟아지고 매섭게도 추었던 어느 겨울. (몇 년 전 겨울)

여느 때와 같이 아침 9시 나는 애기봉을 향했고, 가파른 굽이길이 밤새 꽁꽁 얼어 미끄러웠고, 앞서 가던 차량 2대가 미끄러져 내려오고,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잠시 대기했다가 제설차량이 지나가 고나서야 그 길을 통과해 안전하게 전망대 카페에 도착했어.

아침나절 눈 소식이 없었는데 11시부터 갑자기 두터운 눈이 펄펄 날리기 시작했고, 전망대 카페 가족들과 몇몇 손님들은 눈이 그치기를 기다려 내려가겠다 했었는데, 오후 2시 펄펄 이 아닌 펑펑 쏟아 붙는 눈송이가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고 다들 걸어서 내려가기로 하고 길을 나서고 나만 남아 매장을 지키고 있게 되었지. (전망대 책임자로 있었기에 상황을 더 지켜보아야 했음) 소식을 듣고 당신은 한달음에 달려왔었어.


아래 마을부터 버스의 이동이 막혀 4 정거장 정도의 정류장을 걸어 이동하고, 매표소를 지나 1시간 넘게 눈이 날리는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산길을 흠뻑 땀 흘려 가며 올라와 나와 함께 가겠다고 날 구해 내려가겠다고 씩씩하게 달려왔던 당신.

정말 감동이었지. 고마웠지. 사랑스러웠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고,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털이 엉킨 '야수'의 모습으로 전망대 안으로 들어선 당신을 잊을 수가 없어.


난 솔직하지 못하고, 당신의 흐뭇하고 당당하고 뿌듯해하는 눈빛에 감사와 감동의 액션을 하고 말았지.

사실, 시청에서 운영하는 전망대이기에 책임자로 있는 나와 전망대 아래 전시관측 직원들 모두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관계자들이 오후 5시 안에 데리고 나갈 수 있도록 계획이 세워져 있었어.

전망대 다른 직원들이 먼저 내려간다, 그리고 나는 책임자라 상황을 보고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이동해야 할 것 같아 조금 더 있어야 한다라는 내용의 통화를 했었는데 당신이 바로 출발을 한 거야.


난 아주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맛보는 고립 아닌 고립의 상황과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하얀 세상.

두툼하게 눈이 덮인 숲, 나무, 마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뽀송뽀송 하얗고 가볍지 않은 선물 같은 작은 진주 알갱이들이 창가로 소복소복 쌓이는 태어나 처음 보는 자연의 날 것 같은 생생함을 만나는 것 같은 그 순간이 지금도 눈앞에 선해.

가슴에서 느꼈던 감동도 그 쾌감도 짜릿하게 남아 여운이 강하게 남아있어.

그때 나는 돌아갈 길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은 정말 한 순간도 하지 못하고, 지구 한 귀퉁이의 조금 높이 올라와 처음 맛보는 이 신선함에 어린 왕자의 작은 별에 그 좁은 곳, 그곳은 온전히 어린 왕자의 구역 자신만의 영역, 내 것! 나에게 그날 그 시간 그곳은 세상과 단절된 나만의 장소, 나만의 세상, 가장 멋있고 신비롭고, 새로운 세상이었어.

그날은 당신이 서운하고 민망할까 봐 말하지 못했는데~

20여 년 당신과 살아오면서 이런 상황이 몇 차례 있었어.


처음, 새로움, 낯섦, 또 내가 겪어내야 성장하는 나의 짐, 그리고 나만 느낄 수 있는 포인트의 행복과 즐거운 쾌감의 순간을 만나는 일에 설레고 짜릿한 긴장감을 배부르게 먹고 싶은 그때, 종종 당신이 출연해 상황을 종료시키곤 했어. 그때 아쉬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전하지 못해 우물쩡거리고, 잠시 혼란스러움에 멍해진 나에게 당신은 '고맙지' '내가 와주어 다행이지'를 열심히 확인하며 나의 반응을 살폈어.

응~ 몰랐지. 당신이 단숨에 1시간에 한 대 있는 버스 타고 먼 길을... 그 눈밭을 걸어 걸어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올 거라는 걸. 나 말고도 그곳엔 함께 움직일 직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날 나 엄청 신났었다고, 그렇게 황홀한 광경 속에서 혼자 맘껏 상황을 즐겼다고 말하지 않고 넘어간 내 마음 지금 이렇게 남겨보는 보는 거야.


그간 내가 당신의 텐션에 맞추지 못하고 섭섭하게 한 부분이 많았을 거야 미안하게 생각해요.

나름 섭섭해하지 않게 하려 노력하며 지냈지만, 에너지 충전을 혼자 있는 시간에 빠르게 알차게 할 수 있는 나여서 당신이 가끔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래도 우리 적당히 서로의 거리를 당기고 늘이며 재미난 추억거리 만들어가며 살아왔네요.

우리 중년의 생활도 지나온 시간 돌아보고 다듬어가며 건강하고 멋스럽게 만들어 가요.


* 즐겁고 안전한 중년의 삶을 기대하며 지니에게 유월의 토끼가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