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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스 Nov 12. 2020

우유니에서 칠레 아타카마로

지프차를 타고 우유니에서 칠레 아타카마로 이동하면서 여러 관광지를 둘러보는 2박 3일 투어가 있는데 그중 사막에 있는 노천탕에서 별을 바라보며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상품이 있다고 했다. 별과 온천 그리고 사막.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낭만적인 조합을 꼭 경험해보고 싶어 별표를 세 개나 치며 메모를 해두었다. 가이드북에 의하면 오직 '론리 플래닛'과 '솔트 데저트'사에서 판매하는 상품에만 그 일정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미리 예약을 못했기에 전날 종직이에게 아침 일찍 꼭 그곳에 가서 예약을 하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해둔 터였다. 


아침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니, 역시나 종직이는 아직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나의 고함 소리에 반쯤 눈을 뜬 종직이는 “지금 가서 알아봐도 늦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요.”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조식부터 먹으러 가더니 생각보다 일찍 돌아와, “예약을 잘 마쳤고 심지어 가격도 더 싸요.”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종직이가 예약한 투어는 내가 알아 봤던 투어사가 아닌 엉뚱하게도 호다카 투어사의 상품이었는데, 회사를 찾지 못해 헤매다 우연히 호다카 사무실에 들렀고, 그곳에도 노천탕 옵션이 포함된 상품을 팔길래 싼 가격에 얼른 예약을 마쳤다고 했다. 왠지 불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출발 시간이 임박하여 무를 수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인 후 서둘러 짐을 챙겨 나섰다.     


집결시간이 되어 오랜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은 낡은 지프차에 올랐다. 나랑 종직이, 그리고 젊은 홍콩인 그룹까지 모두 6명이 탑승하여 앞으로 2박 3일간 동행하게 되었다. 운전수 겸 가이드는 우유니 마을 토박이 알렉한드로라는 청년이었는데, 영어를 정말 단 한 마디도 못 했다.(참고로 론리 플래닛에서는 영어 가이드를 선택할 수 있다.)      


덕분에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거나 알 필요도 없이, 그가 말없이 데려다주는 곳에 내려 사진을 찍고 다시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첫날은 기차 무덤과 다시 한번 우유니 사막을 방문한 뒤 칠레 쪽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기차 무덤은 옛날에 실제 기차역으로 사용되다가 무슨 이유로 한참 전에 폐쇄되어 이제는 관광지가 된 곳이었다. 황무지 사막에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기차들이 잠들어 있었고, 관광객들이 아이처럼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나는 얼른 우유니 사막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기에 그 과정이 휴대폰 약정에 끼인 부가 서비스처럼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기차 무덤


"쁘로블레마"(프라블럼)     


다음 일정으로 이동 중 차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 알렉한드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더니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얼떨결에 그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고, 차 점검에 시간이 필요한지 결국 차를 바꿔 탔다. 그 과정에서 시간을 꽤 지체한 후 다시 우유니 사막을 향해 달려갔다.


우유니 사막 입구에서 들리는 콜차니 마을, 이 곳에서 점심식사와 기념품 쇼핑을 한다.


다행히 날씨가 전날보다 좋았다. 하얀 뭉게구름이 적당히 내려앉아 호수와 서로 마주 보고 있었고,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우유니를 감상했다고 하기엔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부산스러웠고, 전날 와본 탓인지 큰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 이제 막 초입에 들어섰기에 좀 더 안쪽을 탐험해보면 인터넷에서 보던 감동적인 장소가 숨어있을 것 같았다.



웬일로 알렉이 우리를 부르더니 자신의 휴대폰에 있는 재밌는 콘셉트의 영상을 보여주며 자기도 이렇게 찍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포즈를 취한 우리를 가운데 두고 지프차가 외곽을 뱅글뱅글 돌며 영화 매트릭스에서나 사용될 법한 기술로 동영상을 찍었다. ‘알렉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하는구나.’ 좋은 영화를 위해 어떤 수고라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신인 배우의 마음으로 감독의 다음 오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렉이 이동을 해야 한다며 우리를 다시 지프차에 태웠다.     


달리는 자동차 차창 밖으로 태양에 벌겋게 달아오른 고개를 활짝 내민 채, 호수의 중력에 갇혀버린 구름과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넉넉히 바라보았다.     


"이제서야 진짜 우유 빛깔 우유니의 속살을 보러 가는구나." 나는 부푼 흥분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다시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유일하게 찍었던 빙글빙글 샷(그것도 차 정말 흔들려서 영상 망했다.)


지프는 한참을 달려도 멈추지 않더니 어이없게도 사막을 그대로 통과하여 다시 콜차니 마을에 닿았다.     

‘남미 여행의 꽃이라 불리는 우유니 사막에서 고작 뱅글뱅글 컷 하나만 찍고 끝이라니... ’     

전날 궂은 날씨 때문에 제대로 된 사진도 못 건진 터라 더욱 속이 상했다. 알렉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앞으로만 나아갔고, 뒷 좌석의 동행들은 어딜 가던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시트에 머리를 기대거나 입을 벌린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아까 들렀던 알렉의 집에서 수리된 차로 갈아탄 후 그의 가족이 운영하는 동네 구멍가게로 갔다. 알렉의 아내가 남편의 도시락을 준비해주는 동안 우리는 그의 아들과 놀아주며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이쯤 되니 현지인 마을 체험 투어인가 의심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나 태연한 종직이와 홍콩 친구들을 보고 있으니, 여행까지 와서 내가 너무 유난 떠는 건 아닌가 생각되어 스스로가 쪼잔하게 느껴졌다.   

   

다시 말통에 기름을 가득 채운 후 어딘지도 모르는 목적지로 향해 출발했다. 어느덧 마을을 벗어나 황량한 사막이 나타났다. 태양의 광선이 선팅되지 않은 차 유리를 부숴버릴 듯 강하게 두드렸고, 창문의 작은 틈 사이를 모래 먼지가 비집고 들어와 목을 간지럽혔다. 뒷좌석 친구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었고, 알렉은 최신 남미 가요 모음을 들릴 듯 말 듯 흥얼거렸다.        

  

내가 가는 이길이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후 7시쯤 목적지인 숙소에 도착했다. 황량한 사막에 휑뎅그렁하게 놓여 있는 작은 모텔이었다.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어둠이 꽤 깊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순간 절로 “우와”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선명한 은하수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별이 쏟아질 것 같던 하늘이었다. 서둘러 내려간 체온 탓에 밖에 오래 있기가 힘들어 이따가 꼭 별 사진을 찍으러 다시 나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아직도 여기가 어딘 지 모르겠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오토로  대충 찍은 게 이 정도


하얀색 시멘트벽으로 에워 쌓인 차가운 방에 침대 두 개가 겨우 놓여 있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청송교도소보다 여기가 더 추울 것 같았다. 인터넷은 당연히 안 터졌고 전기 콘센트가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너무 추어서 옷을 껴입은 채 침대 위에 또 침낭을 깔았다. 샤워실도 유료라고 하던데 받는 사람이 없어 기다리지 못하고 그냥 씻고 튀었다.    

  

차가운 침대에 누워 침낭을 얼굴까지 덮어쓰고 덜덜 떨고 있으니 별이고 나발이고 어서 빨리 잠에 들어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감옥보다 더 추웠던 숙소




다음 날 오전 7시, 차디찬 검은 하늘에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지프차에 올랐다. 후진 숙소에서 추위에 떨며 잔 탓에 온몸이 찌뿌둥했다. 마침 가이드인 알렉이 지나가길래 아침 인사를 건네며 어디서 잤냐고 물으니 지프차 운전석을 손으로 가리키며 멋쩍게 웃는다.     


우리가 숙소가 후지다고 투덜댈 때 홀로 짐 정리를 마친 뒤 불편한 자동차 시트에서 잠을 청했던 모양이다. 전날 알렉의 집에서 본 그의 앳된 와이프와 꼬마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보다 훨씬 어린 그였지만 그 무거운 어깨를 생각하니 마냥 어려 보이지 않았다. 


서로 대화가 필요 없는 우리는, 오늘도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힘껏 달려나갔다. 낡은 지프차는 광활한 대지를 시원하게 갈랐다. 차창 밖으로는 안데스의 만년설이 보였다.



안데스를 넘어서!


어느 한적한 호숫가에 들렀다. 하얀 설탕을 뿌려놓은 것 같은 안데스의 설산 아래 수십 마리의 플라멩고가 호수 위를 우아하게 거닐고 있었다. 와! 탄성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플라멩고를 좀 더 가까이 담고 싶어 신발을 호수에 빠트려가며 무아지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알렉이 빨리 차에 타라고 성화를 부렸다.

     

 다시 십분 남짓 이동했을까? 방금 건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듯 수백 마리의 플라멩고가 무리를 이뤄 살고 있는 엄청난 호수가 나타났다.


라구나 에디온다(Laguna hedionda)
점심 식사 후 휴식 시간


이것은 우유니 사막에 실망한 나에게 볼리비아가 꺼내든 비장의 카드가 아닌가? 설산 아래 호수는 층위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옷들을 입고 있었다. 당연히 살면서 플라멩고를 저렇게 많이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몸짓이 정말 우아하고 품위 있었다. 푸른 바람을 힘껏 들이마시며 정오의 따뜻한 햇살에 몸을 쬐었다. 이 멋진 자연의 조화를 보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바모스"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뒤 다시 알 수 없는 관광지를 향해 출발했다. 지프가 예고 없이 멈추고 알렉이 손가락을 두 번 까딱하면 우리는 기계적으로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다시 차에 올라타는 것을 반복했다.  

    

비슷해 보이는 풍경에 흥미를 잃었는지 아니면 매서운 바람과 모래 먼지 탓에 지쳤는지, 이제는 차에서 내리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름 모를 호수와 돌덩이들을 몇 개 더 둘러봤지만, 초반에 모든 감동을 몰아 써버려서 그런지 어서 숙소에 돌아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호수 1
호수 2
사진 못 찍어 안달이던 플라멩고도 이제 지겹다.


이제 제발 그만 세워...


해가 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했다. 허름한 외관의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숙소는 도저히 돈을 받고 운영하는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바람을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지 약간의 몸살 기운이 맴돌았는데, 원래 안 나오는 건지 그날만 재수가 없었던 건지 뜨거운 물은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웬만하면 그냥 자려고 했는데 모래 먼지가 머리카락과 목덜미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팔굽혀펴기를 해 몸을 데운 뒤, 가쁘게 호흡하며 발을 동동 구르면서 5분도 안된 시간에 냉수샤워를 끝마쳤다.


홍콩 친구들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양동이에 끓인 물을 받아다 샤워를 하고 무사히 하루를 마무리했다.


벽돌로 된 숙소, 역시 춥다.




일정 마지막인 다음 날은 볼리비아에서 칠레 국경을 넘어 아타카마로 가야 했기에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다.      

새벽 4시,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배낭을 차에 옮겨 실었다. 아직 새까만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한 시간쯤 달리니 이미 꽤 많은 지프차가 한곳에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새벽이라 싸늘한 칼바람이 매서웠다. 이빨이 위아래로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     


모여 있는 사람들 너머로 갑자기 엄청난 수압의 연기가 압력솥의 김 빠지는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알고 보니 땅속에 있는 유황가스를 분출 중인 간헐천이었는데, 해가 뜨기 전에만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취익 취익 쿠쿠 하세요~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알렉이 운전하는 동안 계속해서 졸다 깨다를 반복하던 중, 어느덧 아침 해가 고개를 내밀어 급히 차를 멈춰 세웠다. 우리는 볼리비아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태양빛으로 얼은 몸을 따뜻하게 씻어내며 그 기운을 만끽했다.



역시나 내가 별표까지 쳐가며 그토록 기대했던, 사막에서 별을 바라보며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일정은 우리 투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대신 칠레로 넘어가는 길에 노천 온천에 들린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새벽부터 종직이에게 "네가 제대로 예약 안 해서 원하던 투어를 못하게 됐다."라며 짜증을 냈지만, 사실 너무 춥고 피곤해서 ‘어찌 됐던 상관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천온천에 도착했다. 같이 온 홍콩 친구들은 물이 더러워 보인다며 몸을 담그지 않았기에 종직이와 나만 아이처럼 물장구치며 좋아했다. 미지근한 수온에도 밖이 워낙 춥다보니 꽤 따뜻하게 느껴져 쉽게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온천을 마지막으로 힘들었던 2박 3일간의 투어는 끝이 났다. 칠레 국경을 통과하기 전 볼리비아 국경 사무소에서 출국 수속을 밟은 뒤 운전기사 겸 가이드였던 알렉한드로와 작별했다.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벌써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짊어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조금은 안타까웠다. 내가 그에 비해 과도한 사치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의사소통 문제로 가이드로서의 도움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가 밉거나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아쉬움이 진하게 담긴 포옹과 함께 그를 보내며 힘들었던 볼리비아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칠레 아타카마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사실 볼리비아에서의 일정은 참 실망이 컸다. 비행기가 취소되어 라파즈에 하루 늦게 도착했기에 계획했던 일정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남미 여행의 하이라이트이던 우유니 사막에서는 흐린 날씨 탓에 그 명성에 버금가는 감동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예상치 못한 사고로 시간에 쫓겨 맘에 드는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다.    

  

내 인생 딱 한 번의 기회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실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따지고 보면 인생의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딱 한 번씩만 주어지는 것 아닌가? 우리는 뜻밖의 행운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약간의 불운과 실패에 대해서는 갖은 변명을 대가며 온몸으로 저항한다.      


하지만 인생은 딱 한 번뿐이기에 아무리 사소한 우연일지라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모두 치명적이다. 여행을 할 때 이 당연한 사실은 더욱 선명해지고 극적으로 나타난다. 실패와 불운 역시 끌어안되 그것에 발목 잡히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불행에 변명 없이 아파하고, 행운에 뜨겁게 감사하자. 그리고 지나간 모든 우연을, 선택을, 작별을 사랑하자.     


내 인생에 다시는 올 수 없을 볼리비아여, 아디오스!


알렉한드로스, 그리고 홍콩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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