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는 무수한 등장인물이 있지만, 걔 중에는 아이돌같이 캐릭터가 강한 몇 몇이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정약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외모부터 좋다. 그 분의 후손 중에 한 명이 연예인 정해인이라는 썰이 낭설이 아닐 수도 있다. 외모도 좋은데 머리도 좋다. 수원의 대표적인 명물 수원화성은 정조대왕님의 구상도 중요했지만, 그의 거중기가 있지 않았더라면 구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정조였다면 그를 이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같다. 걸걸한 키보드워리어이자 조선의 부흥을 꿈꾼 왕으로서 똑똑하지 말 잘듣지 알잘딱깔센을 고루갖춘 정약용이 얼마나 예뻐보였을까? 포지션을 보면 정조가 테토남 정약용이 에겐녀같은 느낌도 있고? (아 뭐 그렇다고 내가 왕과 신하의 BL물을 쓰겠다는 건 아니고 ㅋㅋㅋㅋㅋ)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정조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식목사업을 진행하고 신하들에게 결과보고를 요구했다 : 지난 7년간 8개 고을에서 나무를 심었는데, 심은 나무가 몇 그루인지 마을별로 정리해서 올려봐. 그런데 보고서가 수레를 한가득 실을 분량. 우리 정조대왕님은 참지 않지 : 약용아, 니가 정리 좀 해와봐라. 근데 분량이 책 한 권을 넘지 않게. 그리하여 다산 선생께서는 요청대로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세로칸에는 날짜 가로칸에는 나무종류를 기입한 자료를 고을별로 정리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 해 그는 엑셀 형식으로 보고서를 만든 셈.
그는 관료로서도 뛰어났고, 천주학을 공부하다 스스로 천주교(카톨릭) 신자가 되었고, 실학자로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능력을 높이 샀던 정조는 그가 천주교 신자임에도 옹호를 해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정조대왕이 갑작스레 승하하시는 바람에 그는 강진으로 유배를 갈 처지에 처하고 만다. (그의 삼형제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큰형은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 작은형은 배교하여 흑산도로 유배. 흑산도로 유배를 간 형, '정약전'이 남긴 유명한 책이 <자산어보>이다. 이 이야기는 2021년 <자산어보>라는 영화로 각색되었다. 재미있는 영화이니 꼭 보시기를! 흑백필름으로 찍었다는 게 신의 한수인 영화다.)
혹자는 그가 조정에 남아 실학자 위주의 점진적인 개혁을 주도하면서 조선 후기를 캐리 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시는 분도 있다. 그렇게만 됐다면 나도 참 좋았을 듯싶다. 송시열이 이 작자가 유교를 그모양으로 교조화시킨 다음 조선 정치판을 노론시대로 만드는데, 그러한 노론세력에 의해 정계진출을 원활히 하지 못했 자 중에 하나가 정약용이다. 심지어 정조 사후에 천주교를 강하게 배척했던 세력도 노론이다. 정약용을 비롯하여 정조의 후원을 받던 남인 실학자 중 상당수가 천주교도임을 감안하면 노론세력의 천주교 배격은 정치적 숙청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작금의 정치상황과 미묘하게 비슷한 느낌을 준다? 특정당이 중국에 시에시에 한다고 까는 그런...?)
왕의 뒷배(!) 하나 믿고 정계에서 활약한 남인들이, 아직은 거대세력인 노론에 맞서 점진적 개혁을 이룩하고 있던 시기. 소수세력으로서 다수세력인 노론을 상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꽤 보수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남인들의 활약을 좋지 못하게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 부침을 겪으면서 조선 후기 국정을 주도하는 것은 얼마나 큰 스트레스였겠는가. 남인의 선봉장 격이었던 정약용에게는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견제가 있었을까.
어쩌면, 그가 강진으로 유배를 간 것은 그 스트레스를 녹여낼 절호의 기회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오랫동안 글을 써오며 느낀 거지만, 글쓰기라는 게 편안하게만 살면 나오기가 힘들다. 뭔가 고통과 회한, 마음의 상처가 났을 때 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글을 쓰게 마련이다.
그렇게 치면 정약용은 조정관료로 있는 동안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지 싶다. 그가 강진에서 남긴 저술이 500여권에 달한다 하니 말이다. 이쯤되면 견제로 억눌린 에너지를 저작활동으로 승화시키신 듯. 걔중에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와 같은 레전더리한 저작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말이다. 덕분에 후손들이 좋은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얻고.
그가 남긴 가장 대표적인 저서가 <목민심서>이다. '목민(牧民, 백성을 기르는 자)하는 관리'가 가져야 할 '마음(心)'을 담은 책이라니. 작명부터 기가 막히다. 이 책은 지방 수령이 백성을 다스릴 때 필요한 도덕적 규율, 행정지침, 통치방안과 이념을 다룬다. 분량은 48권. 자료조사를 하다보니 해당 저서는 당시 향촌사회에 작동하고 있던 전례를 존중하면서도 조선의 국법 역시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또한 조선의 대표적인 법전 <경국대전>처럼 육전(六典)으로 썼다고 한다. 관리자의 지침을 마치 법전과 같이 여섯 가지 부분으로 썼다는 센스 보시라. 치이지 않을 수 없는 남자다. (아 물론 나는 우리 남펴니에게 먼저 치였다.)
노론 세력에 의해 쫓겨난 남인이라는 점도 그렇고, 쫓겨난 곳에서 저술한 책이 하필이면 목민관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도 그렇고. 그가 살았던 시대와 2025년 현재는 약 190년 정도의 차이가 나지만 어쩌면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미묘한 기시감이 드는 건 왜일까.
중국과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며 이전 정부를 악마화 하는 것이, 노론이 남인들을 탄압하고자 천주교를 배격했던 것과 뭔가 비슷한 냄새가 난다. 지금은 대통령에서 쫓겨난 그 분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제대로 읽어봤다면 코로나 이후에 거리로 쏟아진 젊은이들이 사고로 깔려죽을 일이 있었을까? 본인의 부인땅으로 고속도로가 휘는 일이 생겼을까? 주가조작범이 풀려나는 일이 생겼을까?
노려보듯 지켜보고 있는 대한민국 21대 대통령은 과연 본인이 목민관의 수장으로서 정약용의 정신을 잘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일까? 가보면 알겠지. 그래서 더 지켜보고 있을련다.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대통령이 한 둘이어야 말이지. 아직 임기 초반인데 뭐 이리 깐깐하게 구냐고? 시작점부터 잘 잡아놔야 시간이 지나도 바른 방향으로 진행한다 생각한다. 시작점부터 틀어졌던 지난 번 대통령이, 지금까지 보여주는 행태를 보시라. 나는 그런 모습은 또 보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