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에 관심이 적지 않은 나에게 뽕이 차오르는 사건이 몇몇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대동법의 시행'이다. 대동법 17세기 조선조 광해군 때 시행한 제도이다. 아이디어는 심플하다. 세금을 현물(=지역특산물)로 내지 말고 쌀로 내자는 것. 대동법의 시행으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이 안정되고 조세제도가 합리화되며 조선사회에 상품화계경제가 발전하였다는 것은 한국사를 배우는 학생이라면 필히 알고있어야 할 지식이다.
이렇게 멋진 대동법이 진행된 과정은 결코 심플하지 않았다. 제도를 시행하자니 기존의 공납에 관여된 방납인이나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세금을 쌀로 내면 방납인들은 지역특산물로 내는 과정에서 취하던 이득을 내려놔야 했고, 대지주들은 세액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공납인들 때문에 조세제도에 있어서 '방납의 폐단'이 극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반대가 괘씸해 보이기도 하다.
방납의 폐해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조정관료 김육은 광해군에게 대동법을 건의했다. 반대가 거세니 경기도 일부지역부터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김육도 알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전국적인 실시가 어려우니 테스트베드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효종 때까지 강력하게 대동법 시행을 밀어붙인 김육. 그야말로 실학의 정신을 구현한 개혁가이지 싶다.
그렇게 대동법은, 군사적 이유로 특별지역으로 취급받는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하고,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전국적인 시행에 성공한다. 그렇게 걸린 시간이 약 100여 년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은 100년에 걸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낸 셈이다. (캬.... 이맛에 역사 공부하지!)
내 브런치를 자주 들려주시는 작가님 중에 페르세우스님의 브런치에서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다. 젊은이들이 캥거루족이 되는 데 있어서 부모들의 공로(!)가 크다는 요지의 글이였다. 공감한다. 나도 아이를 키우지만 내 주변의 부모들을 보면 지나치리만큼 아이를 보호한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캥거루족 양산에는 사회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일전에 우리 독서모임방에서 경제관련 토론을 하다가 '부동산 시장 성장이 과연 좋은 건가'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이 때 인상깊었던 의견이 있었다. 부모세대가 가정의 부(富)를 증진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고 자산가격이 뛰었던 게 좋은 것같아 보이지만, 그로 인해 자식세대는 집을 구하기가 어려워 독립이 어려워졌다는 것. 해서 부동산으로 돈을 더 벌었어도 나이든 자식을 돌보느라 돈이 다 나간다는 것. 이게 과연 이득일지 다같이 물음표를 던졌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사업체는 대개 서울에 있다. 이렇게도 비싼 지역에 매달려 있어야 남들 못잖은 생활을 할 수 있는지라 울며 겨자먹기로 서울에 모인다. 사회 초년생들이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해서 서울에 자리잡는 과정은 고되기 짝이없다. 서울에서 지출하는 각종 생활비의 합은 세계 네임드 도시에 비빌만한 수준으로 올가가고 있다. 취업을 하자고 서울에 왔는데, 취업을 해도 돈이 안 모이는 아이러니.
때문에 나는 수도의 지방이전을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미 노무현 정부 때부터 수도를 지방으로 이전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반대에 부딪혔던 이유가 서울이 관습법적인 시각에서 수도여야만 한다는 거였던가 그렇다. 이게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역사에서 흑역사로 평가받는 판결이라 하던데. 나는 관습헌법까지 들먹이며 수도이전 반대를 외치는 자들의 모습에서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했던 공납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같은 착각이 든다.
어느 논객이 그런 말을 했다. 헌법재판소, 검찰, 감사원 등의 기관은 사실 서민의 생활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이런 기관부터 지방으로 이전하여 그 땅의 가치를 서민들에게 돌려주자고. 물론 이 나라에서 저러한 기관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거니와 해당 기관이 서민과의 연관이 아예 없지는 않을지라도, 일단은 해당 논객의 주장에 맘이 기운다.
이미 세종시로 상당수 기관이 이전한 것으로 안다. 세종시 공무원 중에는 주말부부를 하는 웃픈 모습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출산율이 0.65를 찍어 소멸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이례적으로 출산률이 1.12를 찍은 곳이 바로 세종시이다. 이점을 감안하면 수도의 지방이전이 갖는 의의가 결코 작다고 하지는 못할 듯하다. (출산율 상승의 원인이 지방이전 하나로만 설명되어질 순 없지만, 또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그런?)
부정선거도 딛고, 독재도 견디고, 계엄도 극복한 게 대한민국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발벗고 나서는 국민이 있는 멋진 나라가 바로 이 대한민국이다. 부정선거도, 독재도, 계엄도 죽이지 못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그러한 경험 덕분에 더욱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조선조 시대부터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낸 경험에 비추어보면 수도이전이 몽상에 그치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뭍 대중이, 서울공화국화되어 서서히 소멸해나가는 과정을 목도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고 기대한다. 때문에 수도이전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좋은 대동법이 '왕권 치하'에 있던 시절에도 전국적으로 시행하는데만 100년이 걸렸다. 그 때보다 권력이 더욱 분권화된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어떤 특정 사안이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건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나라가 통째로 증발할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출산율이 낮다. 그래서 여러 지자체가 출산율 상승을 위한 지혜를 짜내고, 나라에서도 이러저러한 정책을 시행중이다. 걔중 하나가 출산장려금과 아동수당인 것이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심지어 나도 아이를 낳음으로써 이미 받았던 혜택이지만) 출산장려를 위해 금전을 지급하는 게 효과적인가에 대해 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돈을 준다는 이유로 애를 낳는 것도 아니거니와, 장려금의 액수를 높이는 만큼 관련 서비스(예 : 산후조리원) 가격도 꼭같이 올라가드만. 거기에 쓸 돈을 수도이전에 쓰는 게 더 가성비 있지 않냐는 생각이 지극히 개인적으로 든다.
수도이전 과정에서 이해관계를 포기해야하는 누군가는 생기게 마련이다. 단체생활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안타까운 지점이기도 한 것같다. 하지만 이해관계자 분들에게 정중히 부탁드리고 싶다. 그대도 이 공동체에 속한 일원이기에 어느 정도의 양보를 해 주심은 어떻겠냐고. 혹한의 남극에서 허들링을 하며 서로의 체온을 지켜주는 펭귄도 어느 정도 개인의 희생을 기꺼히 감수하는데, 사람이 펭귄보다 못난 게 어디 있어서 양보를 못하겠냐고. (또 달리 보면, 투표를 통해 여론으로 쫓겨나듯 내려놓는 것보다 먼저 내려놓는 게 더 간지있어 보이기도 하고...?)
어쨌든 새 정부도 출범을 했고. 기존에 산적한 과제들이 어떻게 합의에 이를지 지켜보고 있다. 공론장은 시끄럽기 그지없겠지만, 중도적인 시각으로 가장 적합한 균형점을 찾아나가길 바란다.
기존까지는 웩더독(Wag the Dog, 부차적인 것들이 본질을 흔드는 현상)하는 자들의 활약과 정치양극화 때문에 대한민국 정치상황이 보기 안 좋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아무리 다시 생각 해봐도 양 극단세력을 저지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 집단은 '중도층' 밖에 없는 것같다.
지금까지는 중도세력은 행동을 기꺼히 하지 않았던 게 특징(?)이기도 하다. 웩더독하는 소수의 양극단 세력이 중도층과 가지는 차이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느냐/안 옮기느냐'에 있다고 본다. 다행히도 2025년 통계자료를 보니까 중도층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 것같아 희망이 좀 보인다. 대한민국이 중용적인 합의에 무사히 이르기 위해서라도, 중도층이 본인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실천 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