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님들께서는 '껄무새'라는 말 들어보셨는지? '~할껄'이라는 말을 달고다니는 사람을 가리켜 껄무새라고 한다는 걸 나는 최근에 알았다. 비하적인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어느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 있는 표현이지 않나 생각이 든다.
불자로서 불교의 지향점은 뭐니뭐니해도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향해 오늘도 정진한다~ 깨달음이 있으면 고통이 사라진다(= 번뇌가 사라진다)~ 라는 표현을 흔히들 쓴다. 그렇게 치면 불교는 '깨달음무새'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싶다. "인생은 고통이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되싶어보면.... 부처님이야말로 지정한 깨달음무새인 셈!? (귀엽게 봐주십셔.. 귀엽게... 안 귀엽다고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깨달음 관련해서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이 들어온다. 듣다보면 '오 이질문 나도 궁금해!' 마음이 드는 질문이 나오곤 한다. 그 중 하나가 '깨달았는지는 어떻게 알죠?'였다. (실제 질문은 더 긴데 요약하자면 저렇습니다.)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자주 쓰지만 저 질문을 들으니 각성이 됐다. '그르게? 우리는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알 수 있지?' 책을 읽고 타인과 경험을 나누고 미디어에 게재된 여러 이야기를 접하며 '아 그렇구나'싶은 순간이 있지는 하지만, 이게 불자가 얻음직한 깨달음이 맞긴 한가? 그게 깨달음이 맞다면 아직도 때때로 고통스러운 나의 하루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거지? 'Buddha, you're wrong!!!'이카면서 절망스러운 말투로 대사를 쳐야 하나?
스님의 답변은 이러했다 : 깨달음을 얻으면, 깨닫기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아요. 듣자마자 나는 마음 속으로 '........!!!' 상태가 되었다. 아 그렇지, 나도 그랬지. 그게 깨달음이지. 거기에 덧붙여 스님은 이러한 말씀도 하셨다 :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행동과 생각이 자꾸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그건 온전한 깨달음이 아닐 수 있어요.
그렇다, 그렇다! 참으로 그렇다. 깨달음은 머리 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과 몸이 동하는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인지 깨달음의 순간에는 감정적인 벅참이 있다. 그러한 감정의 동요가 있었기 때문에 깨달음의 순간은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 것같다. 하긴, 학습할 때에도 그렇다. 단순히 지식을 넣는 것보다, 여러 배경지식과 얽거나(=정보의 복잡화) 그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동요가 일어났을 때(가령 감동을 느꼈을 때) 더 잘 기억이 난다. 효과적인 학습과 깨달음의 원리가 동일하다는 것이 사뭇 흥미롭기까지 하다.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가 공부를 하는 과정은 유사 깨달음을 연습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를 돌아보건대, 깨달음으로 행동이 극적으로 바뀐 적도 있었고 깨닫는 순간의 경험만으로 내 생각과 행동이 온전히 바뀌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인생빌런을 만났을 때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불쾌함이라는 분별심에 빠져 고통받았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재가수행자라도 생물학적인 자동반사로 '좋다/싫다'가 일어나는 것까지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냐는 회의가 들었던 케이스다.
하지만 이마저도 어느 정도 극복이 되었다. (내 인생의 꽤 큰 수확이었음!) 계(계율), 정(선정), 혜(지혜) 삼학(三學)을 닦으며 정진하라는 게 도움이 되었다.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읽으며 지혜를 닦다가, 우리의 인지활동중 '감각'과 관여된 활동은 시작은 생물적인 반응이되 그 끝은 후천적 학습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고 말았다. 불가에서 오온(=다섯가지 신체의 감각)은 공하다는 표현이 바로 이것이었음을 알고, 후천적으로 내 자신이 어떤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지 재조정을 하면 된다는 심플한 진리를 얻었다. (실제로 그게 적당히 잘 돌아가고 있다! 역시 진리는 내 주변에 숨쉬듯 많은 것이야!)
하지만 이 점을 알아도 화가 팍! 나는 순간에 이를 인지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 아직은 능숙치 않다. 깨달음만큼 행동에 옮기는 게 쉽지 않지만, 달리 말하면 내가 이뤄내야 할 목표가 생긴 셈. 이 목표를 위해 '항상 현재에 깨어있기'를 부차적으로 연습해야 필요성을 느꼈다. 아 근데 '항상 현재에 깨어있기'를 인도어로 '위빠사나'라고 하더라. 요가 명상원에서 말하는 위빠사나가 바로 이 위빠사나! 스님들 사이에서 요가가 진짜 '수행'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깨달음을 추구하고 수행을 하는 곳이 곧 청정도량이라면, 내 삶의 터전이 곧 청정도량이다. 살다보면 많은 부침을 느끼기는 하는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성장하게 한다'여서 그런건지 되려 성장을 하고 있는 듯하다. 헉헉대는데, 힘든데, 뭔가 자꾸 나아져버렸...! (느...느껴버렸!!!)
살아가며 부침을 느껴도 버티고 깨달으며 지내니 자연히 화가 좀 덜 나고 차분해지는 때도 늘어나고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면으로 좋은은 것같다. 의젓해진 모습을 보여주면 자연히 사람들의 신뢰가 올라간다. 어쩌면 사람들이 차분하고 의젓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또한 신뢰하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이 갖춘 깨달음이 있을 거라는 경험과 믿음에서 비롯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사회에 의젓하고 차분한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만큼 깨달은 사람의 비율이 높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적어도 양의 상관관계렸다!) 그런 분위기만으로도 신뢰사회의 무르익음을 감각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든다.
여튼 오늘 하고싶은 이야기 : 깨달음을 얻으면 고통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고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한다. 깨달음을 얻으려거든 현재에 깨어있기를 연습하라. 그대가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곳이 훈련장이다. 그대의 깨달음이 이 사회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리. 깨달은 자들의 차분한 사회를 느껴보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