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유전한다는데 초심이라는 게 과연 초심대로 존재할 수 있을까? 제행이 무상하다는데 초심의 존재를 인정함이 헛되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초심을 잃지 말라'는 조언을 던진다. 나 역시도 초심의 중요성을 느끼며 산다. 내 나름대로는 초심의 잃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나만의 생각이 있는데, 갑자기 그 이야길 하고싶어졌다.
일단 내 초심부터 들여다보겠다. 나는 일찍이 학생이던 시절부터 딱히 되고 싶었던 게 없었다. 아주 잠시 외교관이 되고싶다는 생각은 했다. TV에서 한일어업협정을 하고 배타적 경제수역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그어지는 모습을 보고 화딱지가 나서. 하지만 그 때를 제외하면 내 인생의 첫 목표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것은 이거였다 :
'된사람이 되자'
나는 '된사람'이라는 말을 도덕책을 읽다 알았다. (아 녜 뭐 제가 교과서를 좀 읽었나봅니다...) 이상하게 저 '된사람'이라는 말이 자꾸 기억에 남았다. 난사람보다 든사람보다 된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글이 있었던 것같은데. 어린 마음에 '아 그럼 된사람이 킹왕짱이네?'라고 이해했다.
적어도 그 땐 그 땐 그 땐 그랬는데, 지금도 '된사람'이라는 단어에 자꾸 마음이 간다. 도덕을 공부하며 울림이 있었던 탓인지, 내가 받았던 교육이 꽤 훌륭하여 교육 본연이 갖고 있던 목표가 내게 잘 스며든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님 어쩌면 마땅히 현실적인 장래희망을 이때까지 갖지 못해서 그나마라도 가지고 있던 된사람이라는 목표로 회귀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나이가 들고 삶의 데이터가 쌓이고 뭐가 적정선인지 감각을 익혀가며 '인격'이라는 게 왜 중요한지 나날이 더 깊히 알게된다. 생을 살며 숨쉬듯 만나는 고통을 해방하는 데에 깨달음이 필요하다면, 깨달음의 결과로서 얻을 수 있는 보상 중에 하나가 훌륭한 인격이지 싶다. 따라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재가불자로서의 삶을 꾸준히 가다보면 자연히 된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그래서 나의 N사 블로그의 소개말에는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네 글자만 있다.
그럼 이제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말로 돌아와보겠다. 내가 학창시절에 도덕책을 들여다보다 '된사람'이 눈에 띄었던 딱 그 시점의 나와 지금의 나는 꼭 같지만은 않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때 느꼈던 감흥을 때때로 기억하려고 한다. 기억하고 싶다. 그 기억을 되짚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렇게 어떤 일을 시작할 때의 설렘을 '기억'하는 것이 나에게는 그것이 초심을 잃지 않는 행위이다.
나는 울 오빠와의 연애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곤 한다. 보니까 내가 오빠를 만나 사귀기로 한 날이 2020년 7월 21이던데. (어라? 며칠 안 남았잖아?ㅋㅋㅋㅋ 우리 결혼하면서 식도 안 올렸는데 오빠야 이런 날 좀 챙기도~~)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연애였지만 의외로 참한 남자를 만났다는 흐뭇함이 있던 시절이었다. 하필 또 내 인생이 기획자의 구렁텅이에서 갈려나가던 시기라 동종 IT업계셨던 분에게 기대고 싶은 맘이 있었기도 했고.
한창 코로나라 마스크를 쓰고 나온 오빠의 예쁜 눈망울, 늦은 저녁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워 가디역 근처 놀이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때 수건을 깔아준 작은 배려, 그렇게 그를 바라보다 홀리듯 맞춘 입술. 지금도 글을 쓰다보니 아련하다. 마치 탑노트와 미들노트가 날아간 후 베이스노트만 잔잔하게 남은 향수를 냄새맡는 기분처럼 말이다.
아 뭐 지금 오빠는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어 틈나면 반주를 즐기고 계시지만! (그런 나도 임신 때 찍은 탑 몸무게에서 고작 3kg 밖에 빠지지 않은 통통이가 되어벌였지만 ㅋㅋㅋ) 어찌되었든 이 남자를 사귈 때의 설렘을 간간히 기억하는 덕분에 그래도 어디 내놨을 때 부끄럽지 않은 집안 분위기를 유지하고 살지 싶다. 노래로 바꿔보자면 김진표의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정도?
사랑의 설레임, 깨침의 상쾌함. 사랑과 깨우침을 이어나가겠다는 내 의지는 때때로 수그러들지만, 초심을 기억하는 덕분에 근근히 생명력을 이어나가는 것같다. 최근 들어서는 내 인생직업으로 코딩강사를 찜하였는데, 수업을 배울 때 느꼈던 그 '신남'을 부디 오래오래 기억하고 또한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존버하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