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닉네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불자입니다. 때문에 이 글이 기독교에 대해 더욱 비판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골자는 아니지만 소재를 다루며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종교소재의 글이 불편하겠다 예상이 되시는 분은 다른 글을 읽으심을 추천드립니다.
출강을 하는 학교가 야탑역 근처에 있다. 차로 출퇴근하는 길이 좀 험난할 것 같아서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안 그래도 몽롱한데 서서도 졸음이 몰려온다. 앉을자리는 없고 서서 잘 수는 없으니 잠들지 않으려 쇼츠를 본다.
그렇게 실려온 야탑역. 지하철이 사람들을 토해낸다. 마치 해삼이 내장을 뿜어내듯 사람들이 전동차를 빠져나온다. 나 역시 그 무리들 중 한 명이 되어 출구를 향해 나간다. 들들들들~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오니, 누군가가 무어라 반복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드린다. 무슨 소린가 궁금하여 귀를 기울이니 그제서야 말소리가 들려온다 :
"....천국~ ....수천국~ 예수천국~~!!"
순간 '....아!'하며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쳤다. (이런 걸 보면 내가 불자는 맞긴 한가보다.) 순간 미묘하게 고동치는 감정의 파동을 느끼기도 하였다. 예수천국을 외치는 분의 신심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다. 그분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어떤 구원을 받으셨으리라 확신한다. 나 역시 붓다의 말씀을 통해 어떤 깨침을 얻었다 생각하기에 남기는 글마다 불교적 흔적을 묻히곤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천국을 외치던 분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분이 전파하는 복음(!)이 과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끌어당김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천국'을 듣는 순간 다음에 자동으로 '불신지옥'이 재생되고 있었기도 하고.
공교롭게도 야탑역 복음전파자 분을 마주치기 며칠 전, 유투브에서 흥미로운 영상을 봤다. 영상의 제목은 '기독교인은 왜 종종 무례한가'였다. 제목이 자극적이어서 그런지 저절로 손가락이 재생을 하더라.
내용은 기독교를 비판할 것임이 뻔했으나, 영상의 주인공은 뻔하지 않게도 목사님(!)이셨다. 목회자께서 말아주시는 기독교 비판영상이라니, 이건 귀하지. 무슨 말씀을 하실까? 기대가 됐다. 영상의 화자(話者, speaker)는 '김학철'이라는 이름의 목사님(이면서 교수님)이었다. 고요하며 차분한 음성으로 왜 기독교가 비판을 받는지 냉철한 통찰의 말씀을 전하셨다.
영상의 주요한 말씀을 추려보면 이렇다 :
- 대중으로부터 개신교인들은 배타적이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 이미지의 원인이 되는 사고방식이 있다. 하나는 지금은 굉장한 위기다, 다른 하나는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1) 지금은 굉장한 위기다 : 사람은 위급한 상황이 되면 일상에서 잘 안 하는 행동 - 특히 비윤리적인 행동 - 을 하게 된다. 과도한 위기의식 속으로 신도를 몰아넣는 개신교의 사고와 설교가 배타성을 가중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타인은 평화로운데도 나의 위기의식으로 인하 무례한 침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신도는 스스로 지금이 과연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일을 조장할 만큼 긴급한 상황인지 살펴봐야 한다. 위기와 일상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2)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우리를 방문하여 인도하는 것이다. 본인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불경일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으로 이어진다. 내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타인은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며 폭력적이 된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든 첫 번째 생각은 이것이다 : 여유 없음은 악에 가깝다. 이 말은 내가 애정하는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가 남겼던 말이다. 저 말을 들었던 당시에 A-ha 모먼트를 경험했다. 그 이후로 내 스스로 저 말을 되뇌곤 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인심이 박한 곳은 곳간에 재화가 적다는 말일 것이다. 예외라는 게 있어서 모든 경우에 딱 들어맞지는 않으나, 금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여유가 없을 때 사람은 쉽게 각박해진다.
실제 내 생활을 돌아보면, 여유가 없는 때의 내 행동이 악에 가까울 때가 있다. 가령 두통 때문에 일상이 힘들었던 날에는 아이에게 화를 크게 냈다. (미안하다 아들... ㅠㅠ 엄마는 위대하다 어쩌구 저쩌구 해도 나도 결국 내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소인에 지나지 않았구나...) 집안일과 프리랜서 일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날에는, 남편이 집에서 롤을 하는 모습이 '꼬라지'로 보였다. 결국에는 남편에게 한 마디 하는 모진 아내로 변신해버리고 말았고. 때문에 요즘의 나는 여유가 없다고 느껴질 때라도 일부러 여유가 있는 것같이 행동을 해 보려고 한다. 여유가 없어진 내가 어떻게 악하게 행동할지 모르기에.
두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이것이다 : 일원론적 사고관에 대한 거부감은 어쩔 수 없구나. 나는 예수님의 많은 말씀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이 맞다' 식의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은 여전히 불편하다. (기출변형 : 이것이 아닌 건 아니지 않으냐) 예수님께서 선구자로서 보이신 사랑과 은혜가 나는 참 감동인데. 이와 함께 뒤엉켜 있는, 기독교 특유의 이분법적 사고가 양립한다는 게 흥미롭다. 짐작건대, 구약의 유대인들이 처한 환경이 척박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한 곳에 모으지 않으면 안 됐기에 다양한 생각을 배제한 것일까? 생각도 든다. (러시아도 그렇고 중동도 그렇고 살기 힘든 곳이 동성애 반대, 마초이즘이 잘 발달하는 면이 있는 듯하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배타적 사고는 처했던 환경에 기반한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의 진리는 우주의 별(항성)만큼 많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의 일원론적 사고 또한 넓은 테두리의 진리 안에 포함시키는 자비심을 내고 말 뿐이다.
예전에는 물질과 부를 추구하는 것이 뭔가 천박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각이 좀 달라졌다. 금전으로 누리는 행복이라는 것도 있다. 남편과 담금주 한 잔을 기울이는 호사라든가, 아이와 함께 클레이 놀이를 하는 것이 다 그렇다. 담금주 원액을 사고, 클레이를 사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던가.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행복하게 지내겠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넓은 선택지를 찾으며 행복할 일이다. 금전에 기반한 행복을 너무 존중할 것도 너무 도외시할 것도 아니지 싶다.
다만, 사회가 각박해지면 평시에는 있지 않아도 될 악이 고개를 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에 성장동력이 멈췄다고 인식되면 현실을 개선해 나가려는 능력이 발현되지 않는다. 때문에 사회적인 안정을 위해서라도 국가는 성장과 번영을 추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나라들이 부국강병(富國強兵, 부유한 나라 강한 군대)을 외치는 것이지 싶다. 또한 많은 나라들이 역사적인 실험을 통해 성장뿐만이 아니라 분배가 적절하게 뒤섞여야 함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경제 정치 뉴스 댓글을 보면 분배하면 분배한다고 구박, 성장한다고 하면 부작용을 운운하며 태클... 피곤하다.)
그렇게 우리는 많은 것들을 겪으며 생각의 저변을 확대해 나간다. 책을 통해서든 역사를 통해서든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든 지혜에 눈뜨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든 불교든 사회든 정치든 이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견(正見)을 갖추기 위해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지 않을까. 그렇게 배우고 또한 익히며 즐겁게 산다.
* 연재는 매주 수요일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