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푸르던 나무와 풀잎이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노랗게 빨갛게 혹은 갈색으로. 그렇게 하강이 시작된 계절의 축포를 울린다.
우리는 나무와 풀을 생각하면 초록색을 떠올린다.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들은 사계절의 반나절 혹은 그 이상을 초록잎으로 덮고 있으니까. 나뭇잎이 초록색으로 보이는 까닭은 잎사귀에 엽록체가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움직임이 동물만큼 빠르지 않기에 사냥이 구조적으로 힘들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한지라 식물은 엽록소를 이용하여 당분을 생산해 낸다. (This is 광!합!성! 이런 광합성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성되는 게 산소라는 게 놀라움!) 어찌 보면 식물들은 거진 평생에 걸쳐 스스로 밥벌이를 하는 생물인 셈.
가을이 깊어지고 날이 추워지면 식물은 에너지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광합성을 포기한다. 이파리의 엽록소가 파괴되면 그제야 노란빛 빨간빛이 드러난다. 식물은 밥벌이를 중단한 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다른 색깔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초록색 이파리가 나무의 정체성일지 단풍 든 이파리가 나무의 정체성일지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지 모르겠다. 한창 포도당 벌이를 하는 시절이 식물의 참모습일지, 벌이를 관둔 때에 드러난 모습이 식물의 참모습인지는 그 사람이 가진 어떤 생각의 구조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초록이 무성할 때가 나무의 리즈시절이라도 볼 수도 있고, 초록이 사라진 때가 비로소 나뭇잎 본연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 관점을 지니느냐가 곧 그 관점을 지닌 사람의 생각의 방식을 반영한 것일 듯하고.
하지만 나뭇잎 색깔의 변화가 주는 몇 가지 의의는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나무를 그릴 때 초록 잎사귀에 갈색 기둥을 그리는 때가 많다. 나무의 모습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마는 그 여러 현상이 발견되고 공유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인지적 디폴트'라는 게 생기긴 한다는 것. 하지만 그렇게 정한 디폴트조차 그게 절대적으로 그 대상의 본연의 모습이라 단정 지을 수가 없다. 나뭇잎이 보여주는 색깔의 변화는 우리가 세상에서 '디폴트'를 정하는 방식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 듯도 하다.
이를 좀 더 확장시켜 보면 이런 의의가 있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정한 규범이나 관념은 엄밀한 의미로 쫓아 들어가다 보면 절대적일 수 없다.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가령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도래하면?) 절대적 관점의 한계점이 공격받으며 많은 의미가 해체된다. 하지만 도덕과 규범이라는 디폴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던가? 그들이 성립한 데에는 나름의 맥락이 있기에 (전제가 크게 뒤바뀌지 않는 한) 유지하는 게 변경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전제에 해당하는 것들이 바뀐다면 우리가 정해놓은 규칙들을 개정할 필요도 있다. 절대성에 취하여 변하는 세상을 고정시키려 하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거스르게 된다. 변화에 함께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치가 부딪힌다. 기존의 방식을 변경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인지적 심리작용이 들고일어날 것이 뻔하다. 정치적으로도 변함으로 인하여 잃어버리는 이권과 변함으로써 구제할 수 있는 이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생긴다. 세상이 혼탁하게 보인다.
의견의 대립이 첨예해질수록 사는 게 피로해진다. 이러한 대립의 상태를 보노라면 중화작용 실험이 떠오른다. 산성 용액에 염기성 용액을 첨가하면 중화작용이 일어난다. 중화작용 시에는 열이 발생되는데, 중성에 가까워졌을 때 가장 큰 중화열이 방출된다. 이때에는 플라스크를 조심히 잡아야 한다. 그리고 식히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공론장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조율과정의 뜨거움도 이와 같이 처리하는 게 적절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초록이든 노랑이든 빨강이든 그 모든 잎이 떨어진 겨울의 나무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겨울이다. 겨울 특유의 차가운 공기냄새를 좋아하고, 겨울이 되어서야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함의 소중함이 좋다. 더하여 겨울 시즌에 먹는 호빵이야말로 별미 중에 별미. 얼어붙은 길 위에 있노라면 왜 시에서 겨울을 죽음의 원형상징으로 두었는지 알 법하다. (죽을 만큼 춥다... ㅠㅠ) 하지만 쌓인 눈풍경을 고요히 바라보노라면 우주에 나가지 않고서도 우주의 고요함을 간접체험할 수 있어서 좋다.
와중에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어버리지 않는 소나무를 보노라면, 밥벌이하느라 애쓴다는 미묘한 측은함이 올라오기도 한다. (아무래도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이런 관점도 갖는 거겠지? ㅎㅎ) 누군가는 소나무의 푸르름을 찬탄하며 소나무를 군자의 절개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렇듯 세상에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너무도 다양한 모습을 가진 이 세상에서, 인연에 따라 생기는 관점으로 우리는 삶을 바라본다. 모이고 흩어지는 상식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세월만 흘려보낼 때도 있다. 하지만 또한 그렇기에 오늘도 지혜를 밝히고 어디가 적정선인지를 고심할 수밖에 없는 내가 있다. 그렇기에 생은 고통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빛나는 순간은 있다. 가령 생각을 글로 담아내는 지금과 같이.
* 연재는 매주 수요일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