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아이가 장염에 걸렸다. 바빠진 삶에 치여 식재료 관리를 소홀히 하다가 버렸음이 마땅한 재료로 음식을 만든 것이 그 원인이다. 아이는 구토를 하고 묽은 변을 봤다. 울상을 지으며 '배가 아파'라는 말을 연달아 내뱉었다. 미안한 한편으로...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다가 울음을 반복하는 아이의 모습에 답답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그 이후로 조금 흥미로운 상황을 발견했다. 분명히 아이는 장염이 다 나았는데. 응가도 '얘는 건강함'을 알려주고 있는데. 여전히 아이는 걸핏하면 '배가 아파'라고 말한다. 한참 놀다가 저녁밥 먹으라고 할 때 '배가 아파...' 아침에 어린이집에 가려고 하면 '배가 아파...' 뭔가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배가 아파...' 진지한 표정으로 배가 아픈 아들램이다.
아들의 복통이 꾀병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복통은 실재(實在)했다. 그의 언어적/비(非)언어적 몸짓이 한데 모여 진실된 주장을 하였다. 때문에 거짓말 하지 말라고 다그칠 수도 없었다. 하여 잠시 생각 해보니, 뜬금없이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구성주의 이론이 떠올라버렸다.... ㄷㄷ
아이는 나만큼 오래 살지 않았다. 아이는 사회적으로 묶여있는 규범적인 사고의 틀을 나만큼 오래 연습한 상태가 아니다. 때문에 한 개체로서의 인간 본연의 사고방식을 날 것에 가깝게 보여줄 수 있다. 그에게 배가 아픈 상황이나 저녁밥을 먹기 싫은 상황, 어린이집에 가기 싫은 상황은 사건의 종류와 상관없이 '싫음'의 어떤 상태를 유발하는 원인이다. 그가 장염으로 인한 복통을 겪으며 진하게 느낀 '싫음'을 '배가 아파'로 표현하면서, '배가 아프다'는 상황은 곧 '싫다'는 본인의 상태를 대변하는 표현이 된 거라 짐작된다.
구성주의적 감정이론은 감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기쁨', '슬픔', '분노' 등이 문화권역별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실제로 조사해보면 그렇지 않은 면이 상당하다. '기쁨', '슬픔', '분노' 등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동일할 거라 보이지만 실제로 조사해보면 그렇지 않다. 심지어 뇌파 수준으로 좁혀들어가 분석해도 '기쁨', '슬픔', '분노'라 이름지어놓은 상태에 대한 일정한 표현방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쁨을, 슬픔을, 분노를 논한다. 이는 우리가 살아오며 쌓은 신체반응적 데이터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개념을 생성하고 이름붙임으로서 '구성된' 것이다. 본질적인 면을 따지고 들어가면 그러한 감정은 '없다'.
'없다'라는 말을 보는 순간 불자의 눈에는 '공(空)'이 떠올라버린다. 이내 반야심경도 떠올라버렸다 :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깨달으신 분(= 관자재보살)이 지혜의 마음으로 바라보니, 인지된 것에는 본디 그럴 것 없고 모든 것은 고통이더라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푸트라(부처님 1티어 제자 10인 중 하나)여, 세계는 본래 그럴 것이 없다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인지작용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아복통과 관련하여 자료를 찾다보니, 아이의 복통을 꾀병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주의가 눈에 들어온다. 식탁 앞에서 복통을 호소하면 먹기 싫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스트레스가 복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는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소화기는 부담, 긴장, 싫음, 강박상태에서는 기능이 저하된다. 이러한 이유로 소화액이 적게 분비되어 실제로 소화가 안되는 상황과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한다. 장만 이러하랴. 부담, 긴장, 싫음, 강박상태를 몸이 비상상황이라고 판단하여 염증반응을 일으키면 아이의 몸 어디 하나 아프게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니 아이가 아픈 상황에서 엄마가 미안해하고 책임감을 느껴도 이상할 게 없긴 하겠다...)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리사 펠드먼도 그리 말했다. 우리의 인지작용은 단순히 세계를 구체화하는 것에서 나아가 세계를 '구현'한다고. 우리의 생각이 곧 현실을 창조한다고. 아이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반응하는 그 메커니즘이 신체의 상태를 구현한다 생각으로 이어진다. 아이만 그러하랴, 어른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인류가 그리 해왔을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믿는 어떤 믿음들은 당연히 그래야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인지되고 믿음을 가진 순간부터 그것은 실재하는 효과를 만들고 만다. (그러니 진보가 나쁘네네 보수가 문제네 하는 싸움은 결국 각자의 인지와 믿음 기반의 종교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 실험도 떠오른다. 본인이 예수라고 주장하는 세 명의 정신병자를 한 방에 가두고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관찰하는 실험. 셋은 끝끝내 자신이 예수라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 실험의 결론은 이렇다고 한다 : 믿음은 진실 앞에서도 깨지지 않는다. 우리가 인지의 힘을 힘껏 발현하여 믿음의 영역으로 다가가면 본래 그러한 것이고 나발이고 나의 인식만이 중요해지는 때가 와버린다. 다들 행동하면 짐승간의 싸움 못지 않은 투쟁의 장이 되어버린다. 불가에서 말하는 6가지 세계의 윤회 중에 하나가 축생도(畜生道)인데. 인간의 그 훌륭한 인지작용이 천국을 만들지도 모르나, 자칫 잘못하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상태를 구현해버린다는 게 교훈이라면 크나큰 교훈일런지도 모르겠다.
세계는 그러하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러하다. 인간도 그러하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냥 그렇게 동작한다. 이미 역사가 시작된 이상, 좋든 싫든 우리는 흐름의 어느 시점을 겪고 있을 뿐이다. 온갓 신비한 기계로 물질의 핵심단위를 밝혀내고 우주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는 한편으로, 국가 단위로 범죄조직이 나오기도 하고 남의 나라 땅을 돈으로 사겠다는 대통령들이 나오기도 한다.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This is what it is. 하지만 누군가에겐 이 다양하고 기괴하기까지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불쾌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혹은 필요 이상의 놀라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 (내가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이라도 본래 그러한 거라며 넓은 마음으로 감싸 안을 수는 있다. 그래서 자비심을 내라고 한 것인지도. 이 모든 것이 구현된 세상이 본래는 그분의 뜻이기에 받아들이고, 그분의 일부라 여기며 사랑하라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과 자비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에는 한 발자국 떨어진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여유 없음이 악에 가깝다고 한다면 여유 있음은 그래도 선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돌고돌아 울 아들램의 복통도 그러하게 받아들이고 자비롭게 감싸 안아야지. 부족한 인간인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마저 감사할 일이지 싶다. 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 사랑합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