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본 글은 불교적인 관점에서 기독교를 해석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을 부연설명 없이 글자 그대로만 들으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나(我)...라는 게 없어(無)? 그게 뭔말이야??" 한자는 단어를 압축시켜서 표현해서 기호화하기는 좋은 언어일지 모르지만, 손실압축률이 크다는 면에서 아쉬운 글자다. 그러니 한자어를 접한 다음에는 필히 한국어로 풀이를 써놓는 것이 좋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로 무아(無我, 내가 없다)하다는 것은 '이게 딱히 나라고 정해야 하는 게 없다'이다. 한국어로 풀어쓴 것도 이해가 쉽지 않다. 그래 없어... 그래서 뭐?
'없다'라는 상황은 참 재미있다. 뭔가 없다는 말은 뭣이든 해도 된다는 말로 옮겨갈 수 있다. 목표가 없어? 세우면 되지. 약속을 안 정했어? 정하면 되지. 먹을 게 없어? 구하면 되지. 답이 없어? 만들면 되지.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관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정할 수 있기 때문에 비할 바 없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때문에 옛 승려분들 중에는 대충 가사 걸치고 배까고 다니면서 아무 길바닥이나 앉아 탁주 한사발 자시는 고런 이미지이신 분도 계시다. (불교의 힙함은 전통인 듯도?)
(종교성 주의 경고 : 지금부터 지극히 불자스러운 생각이 시작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원자(Atom)로 구성되어 있고 원자를 쪼개면 그 안은 비어있다(空)는데, 나는 이를 접할 때마다 자꾸 불교의 공(空)사상이 떠오른다. 둘 다 '존재하지 아니함'에서 모든 논의가 출발한다는 게 흥미롭다. '~해야 한다'가 덧칠된 세상에서 '본래 그런 건 없어'라는 관점으로 세상의 다시 들여다보면 새로운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게 본래 그런가? 성실하면 좋은가? 공부는 잘 해야 하는가? 목표라는 게 있어야 하는가? 집안은 깨끗해야 하는가?
물론 이런 덕목들은 여러 경험 데이터가 쌓여 '웬만하면 좋다'는 축으로 합의를 본 사항들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따지면 그렇지 못한 부분도 생긴다. 성실함에 매달리다 나 자신을 잃어버린 삶을 사는 건 좋은가? 공부를 잘 하겠다고 각성제까지 먹으면서 공부하는 건? 목표에 집착하여 n수 공시생이 되는 건 괜찮고? 너무 정돈된 환경으로 인해 환경풍부화를 겪지 않은 아이는 본의 아니게 성장의 기회를 박탈당하기도 한다. 보기보다 세상은 너무도 다양하기에 '~해야 한다'는 말은 특정한 가정이나 상황에서 반짝~하고 잠시만 성립한다. 특정한 가정이나 상황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인연에 따른다'라고 할 뿐.
지금부터는 무아론적 관점으로 세상의 가르침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리고 맨 처음 소환하는 것은 기독교의 원죄설(原罪說, original sin). 나의 10대 시절에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강했는데, 그 비판적인 시각의 핵심에는 원죄설이 있다. 어째서 태어나면서 죄를 짓고 태어난단 말인가? 아직 아무 행위도 하지 않은 순수한 갓난아기까지 죄인으로 만들다니? 구원의 서사를 만들기 위한 장치라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그리고, 본인의 삶이 태어나면서 죄로 얼룩져있다고 인식하며 사는 삶은 얼마나 비참한가? 굳이 본인 스스로를 죄인으로 격하시키며 살 일인가?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저 원죄설이 그렇게 비판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종교적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은유의 일종으로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 교리를 설명할 때에는 꼭 선구자의 일대기를 '이야기'한다. 이론적 설명이 아닌 은유로서 뜻을 담아내야 그나마 본래 의미한 바를 전달할 수 있기에...?)
처음 언급했던 무아(無我)적 관점으로 접근 해 보자면 원죄설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이렇다 정의내리기 어려운 면이 많다. 죄라는 것도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들어가면 죄라고 할 것이 없다. (= 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 조건이나 상황에 부합하면 (= 인연이 생기면) 우리는 너무도 손쉽게 타인으로부터 불편감을 느낀다. 불편감이 곧 죄는 아니겠으나, 죄의 근본은 누군가가 느끼는 불편함이라는 것은 꼭 기억해야 한다.
자료조사를 해보니 원죄의 '죄(sin)'로 번역된 단어가 그리스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고 한다. 하마르티아는 표적을 빗나감, 잘못을 저지름을 내포하는 단어이고, 사람에게 쓸 때는 '결점'이나 '과오'를 가리킨다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는 타인의 기대와 나의 행동사이의 간극에서 비롯하며 그 결과가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일련의 것들이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봐야한다.
아울러 사람은 생각이 제각각이기에 기대와 현실은 늘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죄라는 것이 본래 없을지라도 인간세상의 인연은 필히 죄를 만들어낸다. 마치 양자가 빛이면서 또한 파동이듯이, 이 세상의 어떤 것은 없다고도 하면서 또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불가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색이 있다는 게 공하고) 공즉시색(空卽是空, 공한 것이 색이 있다)이라 한 것이리라.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겠으나 죄악시하는 행위 중에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행위는 극히 드물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 타인의 재산을 빼앗는 게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나쁘다'라는 행위조차 대중에게 편익을 갖다주면 그건 어느 정도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전쟁 중에 적군을 죽이는 것', '부자의 것을 거두어 대중에게 나누는 것'이 그렇다. (= 세금) '죽이는 건 다 나빠'라는 절대주의적 도덕관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지점도 여기에서 나온다. 도덕 관념의 절대화는 인간의 스케일이 그만큼 작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특이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본다. '우주는 넓다'라는 표현이 인간의 스케일에서 우주를 바라봐서 그렇지, 우주보다 큰 어떤 존재가 우주를 본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듯이.
우리는 나를 포함한 다수의 대중에게 불편익을 선사하는 확률이 높은 행위를 쓸어담아 특정 폴더에 저장하고, 그 폴더의 이름을 '죄악'이라고 이름짓는 것 뿐이다. 우리는 기어이 죄를 상정하고, 손쉽게 죄인을 비난한다. 흥미롭게도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관용이 빛을 발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탕아가 돌아와도 기쁘게 반기신다 들었다. (옥한흠 목사님이 그러셨뜸!) 적어도 신약의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사랑'은 죄악을 죄악시하지 말라는 말로 병치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교적으로 접근하면 '본디 죄라는 것은 죄라고 할만한 게 애당초 있지가 않다'이겠고, 기독교적으로 접근하자면 '죄라고 할만한 게 있을지언정, 우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감싸안는다' 정도로 보면 적당할 듯하다. 둘 다 언어적 표현은 달리하지만, 이는 단순한 표현법의 차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싶다.
불가가 공(空)을 논한다 하여 색(色)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부정할 거라면 공즉시색(空卽是空)이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 색(色)은 인연에 따라 생겨나므로 집착하지 말라는 게 핵심이다. 그러니 부처님의 말씀을 허무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굉장한 오역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해야 한다'는 것을 내려놓음으로 길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신다. 이해한다. 누군가는 너무 넓은 공간이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니 자등명(自燈明, 자신을 등불로 삼음)하라고 하신 거 아닐까. 그래서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무엇이 적절할지 생각 해 보라는 거다. 어찌보면 불교는 누구보다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라는 가르침을 담은 듯하다. 나는 불교의 이런 면이 참 좋다.
이다지도 다양한 주체들의 다양한 자등명 덕분에, 우리는 피로하리만큼 다양한 인간군상을 마주한다. 그렇게 우리는 희노애락의 혼돈 속에 사나보다. 이다지도 정해진 것이 없는 우리네 세상에서, 길 잃은 양을 이끄는 목자는 귀하다. 우리 역시도 선지자와 같이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을 안고 살아가기를.
* 글을 매주 수요일에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