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던가, 대학 초년생이던 아이에게 겨울 옷가지들을 전해줄 겸 기숙사로 찾아갔다. 혹 방해가 될까 싶어 "옷만 주고 갈까?" 물어보면, 현이는 언제나 "왜? 저녁 먹고 가면 안 돼?" 하고 되물었다. 그 말이 고맙기도 하고, 평소 식사가 부실한 것 같아 짠하기도 했다.
저녁을 먹은 기억보다 둘이서 온갖 주제의 이야기를 나눈 것만 남았다.
- 동덕여대 사태를 기점으로 학생이 주체가 되는 민주적 학교 운영, (래디컬) 페미니즘, 그리고 결국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여성의 월급이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았던 이유와 그 사회적 인식의 배경, 그리고 시대에 따른 변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 x86세대가 남긴 역사적 공과, 또 하나의 기득권층이 된 그들의 모습, 그리고 지연, 학연 등 인맥이 만들어 낸 자본주의의 종말적 현상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갔다.
- 대학 내에 팽배해지는 능력주의를 두고도 의견을 나누었다. 비교적 가난하다는 이유로 학자금을 지원받는 것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나 비판적 시각을 이해하기 어럽고, 그 근원이 궁금하다는 현이의 물음에, 나는 이해할 수 있는 면도 아쉬운 면도 있다고 답했다.
- 더불어 분배의 가치, 그리고 다정하거나 혹은 배타적인 인간 공동체의 본질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 선출된 권력, 임명된 권력, 시험을 통과한 권력들이 어떤 형태로 비리에 엮이게 되는지, 그리고 그 시스템이 왜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했다.
- 인간 진화 역사의 인문학적, 과학적 지식과 통찰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첨예한 갈등 속에서 대화가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 분야들에 대한 무지나 무관심 때문이라는 현이의 견해에 나는 방아까비처럼 끄덕이며 공감했다.
- 현이가 서서히 그리며 다가가고 있는 미래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스스로 잘 커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 순간이었다.
- 김초엽, 천선란 등 SF 소설 작가와 그 작품들에 담긴 사실과 상상, 추론을 넘나들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인간 고유의 자산이라 여기는 감정조차도 인공지능이 학습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에 공감하기도 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존재를 만들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 인간과 가장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는 현이의 말에 나는 '아, 정말 그런가...'하며 또 놀랐다.
아직 아기로만 보였던 이 아이가 어느새 좋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기대할 만큼 잘 자라 있었다. 이렇게 즐겁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보기 드문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들었다. 언젠가 나의 빈약한 지성마저 무너져, 이토록 귀한 대화가 더는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올까 봐. '공부하지 않으면 이 귀한 친구를 놓치겠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정신이 번쩍 났다.
자리로 돌아와 각각 다른 필체로 필사를 해본다. 하지만 아직 손이 뻑뻑하여 예전의 자유로운 글씨가 나오지 않는다.
거실에서는 주말을 맞아 몇 주 만에 찾아온 현이가 엄마와 다정한 수다를 나누고 있다. 앞으로 한 달간은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육체적, 지적 영양 보충을 위해서라도, 몇 번은 더 찾아가 만나야 할 것 같다.
모든 감정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렌즈를 통해서 더 크게 자라난다. 감정은 우리의 가슴에, 육감에, 손끝에 있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에 있으며 대개는 타인의 생각에 대한 나의 추측과 추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