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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은비 Sep 22. 2023

진짜 보미의 가족

보미오면

° 보미의 가족



 가족이 있는 보육원 아이들은 방학 때면 가족들에게 떠나고는 했다. 보미와 우진이도 역시 할머니 댁으로 일주일 씩 갔었는데, 잠시 보육원을 탈출하는 이 기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그 마저도 탈출 못하는 보육원 아이들 있어 미안하기도 했다.



 미의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보미가 흔적을 보기에는 쉽지 않았다.


오랜만에 들린  할머니 집은 여전한 시골이었다. 간혹 다른 할머니들이 보미를 보면, 이렇게나 컸냐며 신기해하셨고 대견해하셨다. 너무 시골이었지만 정도 가득했고 이런 현장체험도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 곳이었다.



 할머니 의 변소에 들어가지 못했던 어린 보미와 우진이는 오줌이 마려우면 전쟁이 시작된다.

 바닥에 선을 그어서 출발선을 만든 다음, "시작!!!!!"

 바로 '누가 멀리 오줌 싸나' 대결이었다. 분명 고추 달린 우진이가 이길 법한데, 항상 보미가 이겼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아마 운동이 절로 되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다른 성을 가진 우리 남매는 어리니까 할 수 있었다.



 다남 1리 마을에서 가장 꼭대기 집인 할머니 집은 바로 옆이 산이어서 마당을 벗어나면 묘지가 보였다. 그래서 귀신이 나올까 봐 밤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가로등이 있어도 구간이 길어서 밤에 커다란 후레시는 꼭 필요했다.

 

 히 바닥이 뚫려있는 변소는 대로 갈 수 없었다. 전구에 스위치를 올려서 조명을 켜야 했던 화장실이라 엄두도 못 냈다. 아래에 있는 똥통에 빠질까 봐 들어갈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커서도 무서워서 21조로 움직여야 했다. 아, 물론 보미만. 우진이는 그냥 혼자 가라 귀찮아했지만,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법한 화장실이 너무 무서웠다. 밑에서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하는 귀신이 나올 것 같아서 계속 아무 말이든 하라고 닦달했다.


"이우진~ 이우진~ 말 좀 하라고!! 어디 안 갔제! 아무 말이나 하라고!!!!"


평소에 똥폼 잡는 보미가 우스운지 우진이는 대답 없이 한참을 있다가 능구렁이처럼 나타나는 복수를 하곤 했다.


"아, 이보미~ 나 불렀나? 아. 잠들었네 미안태이~"


 아무리 때려도 우진이의 장난은 멈출 수가 없었다. 별의별 욕을 하고 고함치며 난리 부리면서도 바로 끊어지지 않던 똥줄이 얼마나 저주스러웠는지 모른다.




 시골은 과 들이 널려있어서 캐고 따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가지, 포도,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밭들의 종류만도 마트 저리 가라였다.

 할머니 집 마당에는 가을이면 감나무에서 맛있는 홍시가 렸다. 그래서 추석에 가면 항상 달고 맛있는 홍시를 먹을 수 있었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잠자리채로 심스레 따면 성공!! 조금만 잘못해도 터져버려서 익기 전에 따서 후숙 해 먹는 게 국룰이었다.

 마당에 주차해 놓은 아빠의 트럭에 떨어져 버리면, 그 핑계로 물장난하며 세차를 했다. 세차는 특별한 도구 없이 그냥 퐁퐁으로 거품을 내주고, 마당 수돗가 호수만 길게 빼내 헹구기만 하면 끝이었다. 한 번씩 가면 고아원처럼 공격받을 곳이 없어 편했고, 정해진 룰과 규칙에 해방되어 우리 남매는 그렇게 지유를 만끽했다.


 여름에는 시냇가로 가서 풍덩 몸을 담그고, 때로는 아빠가 그물 족대로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그중에 메기를 잡으면 어른들은 매운탕을 끓여서 먹었는데, 메기 매운탕은 그렇게 먹는 거지 사 먹는 줄은 커서 알았다.

물안경이 없어도 깨끗한 물 안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따라다다. 깨끗해서였는지 물안경을 쓰지 않고도 잠수를 해서 눈을 뜰 수 있었다. 아빠의 무릎이 잠기지도 않을 낮은 높이였지만, 어린 우리가 물놀이하기에는 충분했다.


네이버 거리뷰

농촌의 넓은 에서는 사이에 작게 나 있는 길을 통해 차나 경운기가 다닌다. 진입할 때 반대편에 차가 있는지 없는지 잘 보고 주행해야 한다. 농촌길 사이로 차를 운전하는 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해 보였는데, 조금이라도 틀어졌다가는 밭으로 빠질 수 있다. 그 길을 지나면서도 항상 빠지지 않는 아빠의 운전 실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어느 날은 여느 날과 똑같이 가는살짝 옆으로 틀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른쪽 앞바퀴가 논 쪽으로 빠져버렸다.

 길과 논의 높이 차이가 있어서 잘못했다가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속으로는 놀라고 무서웠지만, 미안해하는 아빠에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다행히 오른쪽 앞바퀴만 빠지고 멈출 수 있었는데, 그 순간이 얼마나 아찔했는지 모른다. 아빠에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묻지 않았지만 고민거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보미가 고등학생? 쯤의 일이다.

 시골은 여전히 하루에 버스가 세 대만 다녔고, 막차가    시쯤이었다. 남동생 우진이를 데리고 들어가야 했지만, 조금 걷는 것쯤이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고, 집에는 할머니 밖에 없었으며, 할머니는 차도 경운기도 없었다.

 그날은 남자 친구와 더 놀고  막차는 보내고 놀다가 다른 버스를 타고 걸어 들어가자고 했다.

 아빠 차를 타고 십오 분? 정도였고, 우리는 충분히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겁도 없이 남자 친구와 신나게 놀았고, 일곱 시쯤 동생과 버스를 탔다. 그리고 다남리로 가기도 전, 길목에서 내렸다. 가장 가까이 내려주던 곳이었다.


 막상 내리니 밭 만 보이는 컴컴한 길이 무서웠다. 지만, 조금 걷기 금방 동네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로등도 뜨문뜨문 있는 시골길을 한 시간쯤 걸었을까?

 걸어도 걸어도 보미가 아는 길이 나오 않았다.

 '안 나오지?'

 다남 3리, 2리, 1리가 들어오는 순서였는데, 아무리 걸어도 3리가 나오지 않다. 생각하고 있는 길의 초입조차 들어서지 못했다.

 보미는 책임지고 우진이를 무사히 데리고 가야 했는데,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는 길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두 시간쯤 걸었을까? 일찍이 버스를 타지 않은 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거와 별개로 짜증 치밀어 올랐다.


중간에 여러 곳의 무덤과 공동묘지는 보이는데, 나오지 않는 길 무서웠다.

'귀신한테 홀려서 길이 안 나오는 건가?'

'귀신이 우리를 못 가게 가둬두는 것은 아닌가?' 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네이버 거리뷰

 몇 번의 산 고개를 넘었는지, 힘든 행진에 다리가 얼얼해서 그냥 바닥에 퍼질러 앉아 버렸다. 


귀신이 우리를 못 가게 막고 있는 거라면, 우리는 할머니 집에 도착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영화 많이 본 청소년의 폐해)

인근에 집이라도 있으면 전화 도움을 청해 볼 텐데, 그 흔한 집 한 채가 없는 길이 무서웠다. 누나가 무너져 버리자, 우진이 보미를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 정신 쫌 챙기바~"

"여(기)만 넘으마 거(기)가 나오지 싶은데..."


주저앉아버린 보미를 일으켜 조금 더 걸으니 드디어 우리가 알고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3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곧 2리를 지나 1리가 나오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로부터  시간쯤 더 걸었을까? 네 시간 가까이 걸어, 다남 1리에 도착했고, 우진이는 가장 꼭대기 집인 할머니 집에 가기도 전에 큰할머니 댁에서 뻗어 잠들었다.


 차로 십오 분 걸린 그 길은 걸어서 네 시간이 걸렸고, 우진이와 보미는 때아닌 극기훈련을 해야 했다. 어린 우진이에게 고생시킨 것도 모자라 막장으로 주저앉아버린 스스로의 오만방자함을 깊이 반성했다.

 후에 들은 우진이 말로 어른 같기만 했던 누나가 처음으로 아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어릴 적에 할머니 집은 실내 욕실 없어서 추울 때는 커다란 가마솥에 끓인 물과 수돗물을 반반 섞어서 수돗가에서 씻었다. 수건으로 턱받침을 하고 뽀득뽀득하게 씻겨 주던 할머니의 손길은 굳은살이 갈라져 아프고 투박했지만 정이 담긴 손길이 참 좋았다.

 중학생쯤 되어서야 아빠가 컨테이너 집을 만들어주었고, 실내 화장실을 쓸 수 있었다. 컨테이너였지만 일반 가정집과 다르지 않은 집이었는데 정말 못 만드는 게 없던 아빠였다.


 할머니 집에서 일주일이 지나고 보육원으로 돌아갈 때면 차 창문을 붙잡고 눈물짓던 할머니가 참 마음이 아팠다. 보미도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웃음 지었는데 고아원으로 손주들을 보내는 그 마음은 얼마나 슬펐을까?





 우리 아빠는 다른 부모님들보다 우리를 자주 찾아왔다. 아빠가 오면 갈 곳은 많지 않았고, *마트에 가서 소소하게 쇼핑을 했다. 보미는 슬쩍 가격을 보고 비싼 건 사지 않았고, 어린 우진이가 이만 원이 넘는 걸 고르기라도 하면 티 나지 않게 못 사게 했다.

"야, 그게 뭐가 좋나~ 이게 더 좋아비는데~"

하지만 어린 우진이가 떼를 쓰면 그날은 실패의 날이 된다. 과자랑 이것저것 사면 삼만 원, 사만 원쯤?


 부도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간판 가게가 두 번의 부도를 맞았고 망했다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아빠집에 수북이 쌓인 건강보험료 미납 영수증에 이런저런 미납 고지서들은 볼 때마다 아찔했다. 보미가 어떻게 할 수는 없어서 그저 큰 지출은 없게 하려는 딸의 마음이었다.

 아빠가 가끔 연애라도 하는 게 좋았고, 아빠의 젊은 날이 조금 더 찬란했으면 하고 응원했다.


 아빠에게 서운한 게 있어도 속으로 삭였다. 우진이와 싸우기라도 하면 아빠는 항상 '동생이니까 이해해라~', '누나니까 네가 참고 봐줘라~' , '어리니까 잘 몰라서 그칸다~' 라는 말로 초등학생인 보미에게 이해하길 바랐다.

 한 번도 보미 의견은 들어주지 않았고, 우진이를 봐주라고만 해서 얼마나 서럽고 억울했는지 모른다.


 중학생 때는 처음으로 생일날 아빠의 편지를 받았다. 사실 별 내용은 없었는데, 얼마나 울며 읽었는지 모른다. 종종 써주겠노라 했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그 편지에도 역시 동생 챙겨주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나는? 도대체 나는 누가 챙겨줘?'


 사춘기에 접어들어서인지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외로웠다. 내 입장을 말해봐야 들어주는 이 한 명 없었고 이해하라는 말만 하는 아빠에게 속마음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 세상에 보미를 보듬어주는 단 한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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