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미는중학교 이학년부터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사실 수업 시간에 다른 짓 한다고 시작했는데,손재주가 좋아마음대로 공책을 꾸미는 것이 재미있었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기 때문에 일기장을 사는 건 사치였고, 노트 하나로 일기장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할 짓 없을 때만 꺼내 쓰다 보니 한 달에 열 칸만 써도 많이 쓴 것이었는데, 고등학생 때의 일기장은 너무 빼곡해서 빈 곳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평범한 공책을 다이어리로 예쁘게 바꾸던 보미 때문에 한동안 다이어리 쓰기가 열풍이었다.
먼저 일반 공책을 잡지로 책 꺼풀을 만들어 씌운다.두껍게 하려고 속지를 만들어 넣기도 했다.
첫 페이지는 자기소개.
이름을 시작으로 꾸미는데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는지 모른다. 사진을 붙이고 보미의 프로필을 적었다.이름, 생일, 혈액형, 학교, 주소, 좋아하는 것, 이상형, 취미, 특기, 보물 1호, 좋이 하는 노래, 싫어하는 것, 고칠 것, 올해 일정, 작성일 등등 메모하듯이 적어놓으면 한 페이지 가득이다.
다음 페이지에는 한 달 달력을 크게 그리고,다섯 줄 정도로 짤막하게 일기를 적어 나갔다. 더 쓸 내용들이 있다면 틈새 공간에 작게 적었다. 펜 색깔은 알록달록하고 그림도 그려 넣었다. 잡지에 예쁜 사진이나 글들도 붙였다. 그러면 공책 한 권에 일 년이 담긴다.
많은 친구들이 따라 했지만 마지막까지 쓰는 친구는 없었다. 짧게 한 줄이라도 써놓은 일기가 그때의 상황을 떠 올리게 해 추억이 회상된다.
보미는아빠를 닮았는지 손재주가 좋았다.
교복을 줄이려고 세탁소에 맡기려니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손바느질로 줄여보았다. 못할 것 같으면 세탁소에 맡겨도 되니까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주머니 있는 부분 외에는 특별히 표시가 나지 않았다,
'올레~'
그래서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여 줄였다.치마를 시작으로 춘추복 조끼까지 돈 들이지 않고 예쁘게 줄였다. 안감을 뜯지 않고 안감과 같이 수업시간에 부지런히 바느질을 했다.속으로 보면 티 났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예쁘게 줄여져서 재미있었다.심지어 줄인 교복에 맞추어 와이셔츠도 줄였는데, 그런 보미를 보고 친구들은 엄지를 들어주었다. 물론 자세히 보면 엉망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예쁘게 줄인 교복 같았다.
수업 시간에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줄인 후에는, 다리미 대신 고데기로 열을 가해주었다. 열이 높진 않아도 물 뿌린 후 오래 잡고 있으면 다리미 질을 대신할 수 있었다. 꿩 대신 닭이지.
보미는 골반 쪽은 바짝 줄인 A자 치마가 잘 어울려서 모양은 바꾸지 않고 드레스 같은 후레아 치마가 유행할 때면 단을 뜯어주었고, 짧은 치마가 유행할 땐 바짝 올려주었다.
뿐만 아니라넥타이에 사선으로 이니셜을 박기도 했다.
너도 나도 박아달라고 하니 짤짤이(동전)를 받았다. 돈을 받으면 해 달라고 부탁하는 아이들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역시 몇 명은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한 땀 한 땀 수십 번의 감침질을 굴려서 원하는 글자를 만들었는데이것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지루한 수업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보미가 뽕(볼륨) 띄운 머리를 예쁘게 묶었는지매번 여럿이 찾아와서 묶어달라고 했다.
청소시간이면 족히 다섯 명은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묶어주다 보니 청소시간이 지나버렸고 귀찮기도 해서 백 원씩 받기 시작했다. 보미의 시간과 노동의 값이었다. 그럼에도 두세 명은 여전히 와서 기다리니 묶어주었다.
그냥묶어서 잔머리를조금 빼고 뽕을 띄우면 되는데, 사실 보미처럼 모양 나오기는 힘들었다. 동그란 뒤통수에는 뽕을 띄우면 갈라졌는데, 보미 뒤통수는 걸리는 게 없어서인지 봉긋하게 잘 띄워졌기 때문이다.
친구들 머리를 묶어주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보미는 뒤통수가 없다고 봐도 될 만큼 납작했다.
그리고 편지지가 용돈벌이의 최강 종목이었다.
보미는 그림도 잘 그리고 꾸미기도 잘했는데남자 친구에게 편지지를 만들어 쓰는 것을 보고는 한두 명씩 요청이 들어왔다. 물론 작은 수고비는 받았지만 오백 원, 천 원 정도여서 친구들도 쉽게 이용해 주었다.
남자 친구, 여자 친구의 이니셜과 기념일만 예쁘게 그려 넣어도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편지지가 되는데 욕심이 안 날까. 모양은 마음대로 하고 이니셜과 원하는 문구가 있으면 그려주었다. 이것은 전지 사이즈까지 만들어 봤는데, 몇 날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보미에게 까만 잉크 펜과 연필같이 생긴 12색 연필, 종이만 있다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었다.
어떤 그림으로 어떻게 그릴지 생각한 후에 잉크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밑그림은 그릴 때도 있었지만 종이에 표시가 남아서 대부분 안 그렸고, 손 닿는 대로 그려나갔다. 글자체를 꾸며가며 원하는 문구를 쓰기도 했고,주문에 맞춰 Happy birthday, 기념일, 수능 등 예쁘게 그려주었다.
쳐다보지도 않던 영어 교과서는 필기체를 쓰겠다고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른다. 하필 영어 선생님은 필기체 부분은 보지도 않고 넘어가서 참 아쉬웠다.
까만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색연필로 연하고 진하기를 조절해 가며 색칠했다. 쓰다 보니 다른 색연필로는 원하는 느낌이 안 나와서 쓰던 것만 쓰게 됐는데 예술가를 좀 이해했달까? 하하.
고작 12색 색연필이었지만, 몇십 장이나 만들고 그렸는지 모른다. 공책, A4용지, 8절지, 4절지, 2절지 크기를 따지지도 않았다. 잉크 펜 하나지만 예쁘게 그리고 꾸며내기엔 충분했다.
2절지, 4절지
보미의 편지지 만들기는 오프라인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개인 블로그에 꾸며둔 사진을 올리고, 주문은 연락 달라고 남겼더니 주문이 들어왔다.
학교에서만이 아닌 모르는 사람에게 판다는 것은 엄청 긴장되고 설레었다. 사실 꾸미기에 택배로 보내는 거며 택배비에 우체국까지 왔다 갔다 하는 일은 본전 치기나 다름없었지만, 인터넷으로 판매했다는 자체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