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가족의 보금자리가 생겼다.
단칸방 생활을 한 지 2년만에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밖으로 가지 않아도 되고, 부모님과 한 집에서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아버지가 근무 하는 시청과 어머니의 가게주변에 집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했고, 주변의 아파트가 아닐까 짐작했다.
앞서 이야기했던대로 근처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어 아파트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앞으로 외할아버지를 덜 보겠다는 생각에 매우 기뻤다.
그 때까지도 종종 계속되는 외할아버지의 구박에 짜증이 날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대망의 이사 날인 일요일이 되었다. 단칸방에서 가져가는 가구는 장롱 하나였다.
앞으로 아침은 집에서 먹고, 점심과 저녁은 가게 단칸방에서 계속 먹는다고 하여 이 곳에서 가져갈 짐이 단촐했다.
그래서 새로운 집에서 쓸 가구와 식기도구들을 새로 샀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이사를 도와주는 사람들과 새 전자제품들과 가구들이 실린 차량이 왔는데,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이 짐들은 새 집으로 가야 하는데, 왜 이 곳에 내릴려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깐 지켜보니 문구점 3층으로 짐을 나르고 있었다!!!
이를 보고 드는 것은 망했다는 거다!!
당시 외할아버지 건물은 4층 짜리로, 1~2층 가게들은 월세를 주고 있었고, 3층은 2개의 가정집이 있어 전세를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존에 살고 있던 한 집의 전세 계약이 마무리 되자 연장을 하지 않고, 우리 가족이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미리 이 같은 상황을 물어보았으면, 부모님은 대답해 주었겠지만 어린 마음에 설마 3층으로 이사올 것이라고 생각치 못했다.
그래도 단칸방을 벗어나, 한 집에서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다는 장점이 너무도 커서 기뻤다.
그리고 재밌게도 동생은 단칸방 생활을 기억하지 못하고, 3층 집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그 시기의 동생은 유치원과 초등학생 1학년이었으니 너무 어렸던 터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부모님은 그 때의 단칸방이 슬픈 기억이기에 앞으로도 동생은 모르고 살면 좋을 것 같다.
기억에 남아있는 3층 집의 구조를 떠올려 보았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2개의 방과 화장실이 떠오른다.
방1은 나와 동생이, 방2는 부모님이 사용했는데, 이 집의 평수는 15평 정도로 작았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 머물 수 있는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이 집은 굉장히 재밌던 것 중 하나가 1층 문구점과 다이렉트로 통화가 가능한 인터폰이 달려 있었다.
우리 가족이 1층 단칸방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나와 동생은 3층 집으로 올라와서 공부 하거나, 쉬는 편이었는데 서로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바로 연락하기 위해서 부모님이 인터폰을 달아놓은 것이었다.
이 때에는 핸드폰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일반 전화로 하면 전화비가 꽤 나와서 인터폰이 굉장히 유용하게 쓰였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문구점을 닫을 때 샷다를 꼭 내렸다.
그 소리가 굉장히 커서 3층 집에서 TV를 보거나 컴퓨터로 딴짓을 하고 있다가 샷다 내리는 소리가 들리면 부모님이 곧 집에 들어오기 때문에 얼른 공부하는 척을 했었다.
가끔 너무 TV나 컴퓨터에 몰입하고 있으면 샷다 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해 놀다가 혼나기도 했다.
부모님의 퇴근 시간은 거의 저녁 10시 이후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학교 준비물을 문구점에서 모두 준비해야 했고, 대형마트가 제대로 들어서기 전이라 정말 장사가 너무 잘 되었다. 여기에 체육복과 실내화, 실내화 가방, 유행하는 장난감 등 팔 수 있는 물건들이 많았다.
덕분에 아버지가 번 돈으로 생활을 하고, 어머니가 문구점을 하며 번 돈은 저축하며 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절실하게 돈을 모았냐면..... 단칸방 생활부터 약 4년간 우리 집은 외식을 한 적이 없다.
외식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정육점에서 삼겹살을 사서 집에서 구워먹었다. 이렇게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이 가장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의 나와 동생은 하나도 불만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어머니의 요리 솜씨가 뛰어났고, 군것질을 사 먹기 보다는 어머니의 삼시세끼만으로도 충분했다.
가계를 꾸리다보면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재료를 사서 집에서 사 먹는 것이 싸게 먹힌다. 부모님은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돈을 아끼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물론 그 때에는 이런 사정을 몰랐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 물어보니 외식을 하지 못한 숨은 뒷이야기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의 첫 외식이 아직까지 기억나는데, 중학교 3학년 때 지금은 없어진 경양식 집에서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 정식을 사 먹었었다.
떠올려보면 맛은 평범했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한 첫 외식이라는 점에서 그 장소와 기억이 행복하게 남아있다.
그 후, 우리 가족이 3층 집을 벗어나게 된 것은 4년 후였다.
주변에 신축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었는데, 당시 부모님이 가진 돈이 2억이 조금 안 되는 정도였다고 한다.
분양 신청도 했지만 당첨되지 않아 부동산에서 피를 주고 분양권을 구입했다.
은행 대출을 이용해 부족한 돈을 채워야 했지만, 아버지의 공무원 월급과 어머니의 가게 운영으로 좀 더 고생하면 은행 대출 이자를 내고 원금도 충분히 갚을 수 있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이렇게 부모님은 자식들을 조금이라도 좋은 집에서 키우기 위해 본인만의 집을 마련하였고 시간이 지나 현재는 대출을 전부 갚고 노후 준비를 즐기고 계신다.
이제 시간이 지나 내가 독립을 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