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1년 살기 도전 중
시지프스는 죽음을 속이려고 한 죄로 신들에게서 영원히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지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나 스스로 나에게 시지프스가 받은 형벌을 내렸다. 그동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과 비교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언제나 남의 눈치를 의식하며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잣대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내 삶을 통제해기 위해 고투했었다. 그러다 보니 내 인생의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방향을 바라보지 못한 채로 보내야만 했고, 사소한 것조차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타인을 바라보는 삶은 '시지프스의 벌'과 같다.
그리고 오랫동안 타인과 비교하는 삶에 익숙해진 채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무의미한 경쟁에서 조차 이기기 위해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곤 했다. 또한 항상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욕심이 끊임없이 생겨나 현재의 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수 없었다. 막상 끝날 것 같만 같았던 비교의 대상은 양파 껍질처럼 얼굴을 바꿔가며 계속 나타났고, 똑같은 삶을 반복해야 했었다. 끝나지 않는 비교의 삶은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처럼 신들의 형벌을 받는 삶과 같다. 여유를 즐기는 건 사치라 여겼고, 그만큼 행복을 느끼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늘 눈앞에 있는 비교 대상만 바라보고 있다 보니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은 점점 좁아져 갔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던 나의 삶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멈춰보니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나 자신이 보였다. 그리고 차츰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며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상 속 소소한 행복들을 느끼면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서 난 하늘이 만들어주는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게 좋다. 고개를 들어 올려 보거나,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넋을 잃은 채로 보게 된다. 바람이 푸른 하늘을 캔버스 삼아 하얀 구름으로 그려 놓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예술작품이 따로 없다. 잡다한 생각들을 비워내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머릿속에는 행복한 생각들로 채워진다.
'예전에도 지금도 똑같은 하늘인데.'
'왜 이제야 바라보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다닐 땐 눈에 들어오지 않던 내 주변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천천히 길을 걷다가 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보도블록 틈에서 자란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의 아름다움'
'카페 근처에 누군가 나눠주는 빵조각을 먹기 위해 모여든 작은 새들의 귀여움'
'무더운 날 그늘과 바람이 주는 시원함'
'내리는 빗방울이 얼굴에 스칠 때 느껴지는 촉촉함'
지금껏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을 바라보고 느껴보니 곁에 있던 딸아이와 같은 동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니 저절로 행복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불필요한 걱정은 잊은 채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잠시 쉬어보니 일상이 행복들로 채워진다.
우리 부부는 매일 아침 딸아이를 등원시키고서 어학원으로 향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시간여유가 있으면 산미가 도는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마드리드 시내의 한적한 거리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아내와 함께 즐기는 커피 한잔의 여유가 참 좋다. 추울 땐 따뜻한 커피잔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고, 더운 날엔 입안 가득한 커피 향이 더위를 잠깐 잊게 만든다. 수업이 끝나면 우린 근처 식당에서 오늘의 메뉴(Menu del dia)를 먹거나, 집에서 만든 샌드위치를 가지고 공원 나무 그늘에 앉아 한가롭게 점심 식사를 즐긴다.
여유롭게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면 우리 부부는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눈다. 대부분의 주제는 주변에서 느낄 수 있는 좋은 감정들, 딸아이에게 찾아온 변화들,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싶은 점들, 그리고 각자의 꿈을 찾아가는 기쁨과 힘든 점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의 주제는 언젠가부터 회사나 비교 대상에 관한 것들이 아닌,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스페인에서 지내는 몇 개월 동안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여유와 행복들을 누리면서 나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하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한국에 있을 땐 아이와 함께 놀아주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매일 놀아주지 못했다. 더불어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열정적으로 아이와 무언가를 함께 하지는 못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막상 시간이 많아졌다고 해서 하루종일 놀아 주거나, 불타오르는 듯한 에너지가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동안 함께 하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할 수 있어 좋다.
잔디밭에 누워 함께 굴러다니기, 축구하기,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숨바꼭질, 카드놀이, 인형놀이, 그림 그리기, 스페인 이곳저곳 여행 다니기, 나무에서 레몬 따기, 밤하늘 아래 다 같이 누워 별 보기, 갓 태어난 아기 새 구경하기, 바다 수영하기, 고래 보기, 암벽 타기, 요리하기, 그리고 열쇠구멍으로 염탐하기 등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당연히 아빠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더 자주 들려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딸아이는 아직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빠, 싫어! 아빠, 못생겼어"
"엄마만 좋아"
그러다가도 어느새 나의 품에 안겨서는 부드러운 볼을 나의 얼굴에 비벼 될 때에는 너무 사랑스럽다. 또 영리한 딸아이는 걷기 싫을 때나 가끔씩 본인이 필요한 게 생길 때마다 수줍은 표정을 하고서 나에게 귀속말을 한다.
"아빠, 사랑해"
"아빠, 잘생겼어"
그러면 언제나 딸아이 손에는 인형이 들려있거나,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이 주어진다. 뻔히 보이는 딸아이의 아부에 기분 좋게 넘어가 준다. 그래서 딸아이를 키우는 건가 싶다.
딸아이와 함께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나에게 어느 때보다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쭉 아이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딸아이는 점점 자라면서 이 순간의 소중한 시간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빠와 함께 공유했던 감정들은 마음속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한다.
테이블에 앉아 컴퓨터로 글을 적고 있는 내게로 유치원을 마치고 돌아온 딸아이는 놀아 달라며 다가왔다. 그리고선 내 컴퓨터를 자기 것인 양 키보드를 마구 눌러보다가 음성기능이 되는 것을 찾아냈다. 그리고 온갖 말을 하면서 모니터에 글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래서 문득 내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딸, 아빠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 편지로 적어줘"
"좋아, 그럼 아빠가 먼저 해"
이렇게 우연히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썼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시작했는데, 어느덧 딸아이의 마음속 이야기를 듣게 되니 저절로 행복으로 내 마음 가득히 채워졌다.
사랑하는 딸에게.
새로운 유치원, 처음 만난 선생님과 친구들 모든 것들이 지금은 처음이라 낯설고 적응하기 힘들 거야. 우리 딸은 지금 너무너무 잘하고 있는 거 같아. 엄마, 아빠는 너를 처음 유치원에 보낸 후 너의 모습에 너무 감동했어. 우리 딸이 엄마, 아빠랑 유치원에서 헤어질 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이야기했어.
"안녕. 괜찮아. 나 잘할 수 있어"
엄마, 아빠는 네가 정말 이렇게 멋진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하려고 용기를 내는 모습이 너무 대견했어. 그리고 우리 딸이 엄마, 아빠 보다 더 좋은 마음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 엄마, 아빠는 항상 우리 딸을 믿고 스스로 잘 헤쳐 갈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딸아 항상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인공이 되렴. 그래야지 나중에 행복해질 수 있어. 또 자신감 갖고 당당해져,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하고, 어려운 게 있으면 도와 달라고 이야기해. 그리고 싫은 거 있으면 싫다고 꼭 말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계속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게 될 거야. 그러나 치카치카랑 씻는 거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우리 딸을 많이 사랑하는 아빠가.
딸이 아빠에게 들려준 편지 내용을 옮겨 적었다. 다섯 살 아이의 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옮겨 보고 싶은 마음에 내용 수정은 하지 않았다. 다소 이야기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지만, 아이의 따뜻한 마음만큼은 느낄 수 있다.
아빠에게
아빠 아빠는 누구나 친절하고 아주 멋진 사람인 것 같아.
나는 이제부터 아빠랑 함께 있을 거야.
근데 난 아직 너무 어리고 스페인어도 못 써서 아직 잘할 줄은 없지만, 다녀 보니까 너무 즐겁고 흥미로운 계획도 잘할 수 있는 것 같아.
나는 엄마 아빠 말을 잘 믿고 싶지만 나는 왜 잘 안 믿어 줄까. 나도 이제부터 엄마 아빠랑 같이 살고 싶은 말을 계획하고 싶어. 근데 아직 내가 너무 친절하지 않아서 좀 걱정이 돼.
근데 엄마 아빠는 내 말도 잘 알아듣고, 아주 멋지고 아주 흥미롭고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어.
엄마 아빠가 함께 있는 건 언제나 언제나 행복하니깐 말이야. 그래서 나는 엄청 기뻤어
나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멋진 엄마 아빠의 친구들과 그리고 내 친구들을 다시 만나 보고 싶어.
그런데 언제 나는 스페인에 다시 여행을 떠날까, 친구가 온다고 했지만 아직은 안 오는 것 같아
그래서 내 말대로 아빠랑 엄마랑 그리고 엄마 아빠는 언제나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엄마 아빠 제 말 들려요. 저는 아주 엄마 아빠랑 함께 살 수 있는 아주 멋진 딸이에요. 저가 아직도 이렇게 멋진 딸로 자라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이렇게 결심했어요
엄마 아빠들은 친절하고 정말 따뜻한 마음을 갖고, 저도 이제 엄마 아빠와 함께 편지를 쓰고 떠날 거예요.
저는 이제는 아주 친절한 딸이 될 거라고 결심을 두 번이나 했어요
그럼 저는 안녕히 가세요.
오랜 시간 동안 영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영어를 통해서 넓을 세상을 여행 다녔다. 스페인어를 배우기 전까지는 영어 하나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나의 가슴은 두근거린다.(참고로 영어와 스페인어를 하게 된다면 전 세계 198개국 중 137개국 약 70%의 국가를 언어장벽 없이 여행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이 다개국어를 하게 되다니!'
우리 가족이 용기 내어 가지게 된 소중한 시간을 스페인에서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지금 3번째 언어인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바라보니 신기하면서 자랑스럽니다. 그리고 스페인어 실력이 점점 늘어가면서 우리의 자존감 역시 커져가고 있으며, 즐기면서 성장하는 모습에 행복을 느낀다.
"Hola. Buenos días."
(안녕. 좋은 아침이야.)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 우리 가족은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이웃들과 마주치면 가벼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아직은 딱 거기까지가 좋은데, 그들은 더 많은 말을 우리에게 할 때면 나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한다. 그리고 눈치껏 상대방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어설픈 호응과 웃음으로 마주한 상황을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소통은 불가능했지만 이웃들은 반갑고 환한 미소로 우리 가족들을 반겨줘서 나름 이웃을 알아가는 재미를 느낀다.
3개 언어를 할 수 있는 삶은 매력적이다.
스페인어를 계속 공부를 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마트나 식당에서 종업원들이 나에게 투척하는 무수히 많은 스페인어 단어들 중에서 한 두 개의 단어가 드디어 들리기 시작했다. 몇 개의 단어를 가지고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상황에 맞춰 유추하고서 대답할 수 있었다. 점차 경험이 누적되다 보니 바닥이었던 자존감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다. 그리고 아직은 짧은 스페인어 실력이지만 주변 친구들과 소통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과 나눈 대화들 중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고방식들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여러 고정관념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스페인어를 조금씩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스페인 사람들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처음 스페인 사람들의 말투가 딱딱하고 억양이 부드럽지 않아 그들에게서 배려와 따뜻함을 잘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프랑스어나, 포르투갈어처럼 부드러움이 없는 언어적 특성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가졌던 선입견을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서툴지만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스페인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보다 더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우릴 반겨준다. 이렇게 이곳 사람들과 조금씩 소통하며 스페인이 가진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