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1년 살기 도전 중
비행기 안 좁은 의자에 13시간가량 앉아 있자니 시간이 참 느리게 흘러간다. 잠을 이루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는다. 영화도 음악도 책도 심지어 술도 소용이 없다. 어느덧 비행기의 속도가 느려지더니 창문 밖 짙게 깔린 밤하늘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어둠 때문인지 스페인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예정된 도착시간 보다 1시간 정도 늦어졌다. 집주인의 부탁을 받고 우리에게 집 열쇠를 전달해 줄 분을 찾으려고 서둘러 공항 밖으로 나왔다. 이후 가지고 온 짐이 많아 콜밴을 불러야 했는데, 한국에서 준비해 온 휴대폰 유심이 제 기능을 하지 않아 당황했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우린 1년간 머무를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어둡고 차가운 공기가 우리를 맞이했고 시간은 어느덧 저녁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집안을 대충 둘러본 뒤 가져온 짐에서 잠옷만 간신히 꺼내 갈아입고선 씻지도 못한 채 좁은 침대에 셋이서 꼭 붙어 잠을 청했다. 냉기가 가득한 집안에서 좁은 침대는 오히려 서로의 온기를 나누기에 좋았다.
이 집은 나의 친구 집이다. 처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 스페인 어느 지역에서 1년간 살지 이곳저곳 알아보다가 결국 마드리드 친구의 집으로 결정했다. 다행히 우리가 도착하는 시기에 맞춰 세입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는 웬만한 살림 도구가 모두 구비되어 있어 우리 가족이 1년 생활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스페인에서의 첫 기억은 추위와 몸살
시차 적응이 안 되어 새벽 4시쯤 잠에서 깨어 보니 출출한 느낌이 든다. 잠시 후 아내와 딸아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어났고 역시나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집안인대도 침대 밖으로 나오니 쌀쌀한 탓에 겉옷을 걸쳐야 했다. 주방 구석구석을 뒤져보니 조금 남아있는 쌀과 건조 미역 그리고 소금을 찾을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의 첫끼니는 나름 갓 지은 밥과 소금으로 끓인 미역국이었다. 배가 고팠기에 맛이 일품이다. 그리고 따뜻한 국물이 몸속에 들어가니 비로소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니 먼지 투성이다. 아직 새벽이라 조용히 청소를 시작했다. 계속하다 보니 어느새 입주청소가 되었고, 창밖에는 이미 해가 떠올라 집안이 환해졌지만 하던 일은 끝이 나지 않았다. 당연히 우리의 짐은 아직 가방 안에 그대로이다.
스페인의 겨울 기온은 영상 5도 정도지만, 한국보다 습도가 높아 훨씬 춥게 느껴진다. 집안에 있는 라디에이터를 아무리 틀어도 실내는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집안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으니 아늑하고 편안한 '내 집'같은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이렇게 스페인에서의 둘째 날을 맞이하였다.
'춥고, 배고프고, 힘들다.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집안 청소에 짐정리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걸레를 몇 번이나 빨고 닦았는지 손아귀가 욱신거린다. 하루종일 서늘한 집안에서 일하다 보니 우리 부부는 몸살기운을 느낀 채 침대에 쓰러졌다. 그 이후로도 며칠 동안 정리하는 일은 이어졌다.
'내가 어디에 있지? 여기가 스페인 맞지?'
'다시 한국 가고 싶어 진다.'
지친 몸으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기 온 지 일주일도 안되었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우리가 지내는 동네는 마드리드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조용한 주거지역이다. 주민들 절반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고 관광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곳엔 동양인이 거의 없다. 이런 동네에 어느 날 갑자기 외모가 다른 동양인 셋이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면서 나란히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신기한지 사람들의 눈길은 자꾸 우리 가족에게로 향한다.
'뭐 어쩌겠는가, 이곳에선 우리가 외국인이니까!'
거리를 걷다가도,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에도 여기저기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져 불편하다. 어르신들은 눈이 잘 안 보여서 그런지 우릴 빤히 쳐다 보고, 아이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뚫어져라 바라본다. 어쩌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미소를 짓으며 눈인사를 한 채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른 후 계산대 앞에 서면 점원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데, 전혀 알아들 수가 없다. 영어로 다시 말해달라고 하면 그들 역시 알아듣지 못한다. 그럴 땐 대충 눈치로 지례짐작 하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여러 나라로 여행이나 출장을 많이 다녔지만 이 정도로 쳐다보는 시선을 느껴본 건 처음이다. 관광지가 아닌 곳이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충 이 상황을 흘려 넘기려고 노력해 보지만,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영어도 안 통하고, 우리도 스페인어를 전혀 못 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불편한 시선과 소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꼴에 따라 상대의 태도가 달라진다.
예전부터 해외로 나갈 때면 차림새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편이다. 말끔하게 입고 외국인을 만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외모에 따라서 상대방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던 터라, 우리 가족은 평소 외출할 때면 한 번 더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길을 걷다 동네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띠고 눈인사를 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경계하거나, 신기하게 바라보던 동네 사람들의 눈빛이 조금씩 사라졌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당당해져야 한다.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당당해져야 한다.'는 문구를 떠올리면서 다시 현실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남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최대한 당당하게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리고 이 상황도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며 나와 가족들에게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언젠가부터 이웃들은 우리가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외출하기 위해 예쁘게 차려입고 길을 걸어가는 딸아이를 보면 어르신들께서 먼저 이쁘다며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주신다. 그리고 어느 날 마트에 갔더니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웃지 않던 직원이 먼저 웃으며 안부를 물어보기 시작한다. 차츰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받았던 불편한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널리 알려진 관광지에서는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곳을 벗어나면 스페인어 말곤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드물다. 마트에서도, 식당에서도, 관공서에서도, 은행에서도 내가 가는 곳만 그런 건지 대부분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곳이 거의 없다. 나처럼 스페인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전화와 초인종 소리이다. 신호가 울리는 순간 온몸에는 항상 긴장감이 돈다.
스페인에 거주하려면 관공서에 전입신고와 외국인등록을 해야 한다. 이 과정을 경험했거나 하게 될 사람들이 있다면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공감하거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스페인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관공서, 병원, 은행 등 어딜 가더라도 예약을 꼭 하고서 방문을 해야 한다. 특히 관공서의 업무를 보기 위해서는 인터넷으로 예약을 먼저 해야 한다. 막상 어렵게 접속해 보면 예약 가능한 날짜와 시간이 없다는 메시지만 보게 될 경우가 많다. 예약을 해도 빠른 일정을 잡기는 어렵다. 운이 좋으면 2주 안에 약속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예약을 했다면 절차에 필요한 수수료는 사전에 직접 은행에 납부한 뒤 영수증을 지참하고서 관공서를 방문해야 한다. 심지어 은행에서도 정해진 요일과 한정된 시간에만 납부 업무를 진행하기에 이것마저도 쉽지가 않다.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것들, 그러나 이곳에선 당연한 것들이다.
드디어 예약한 날짜가 도래되어 준비한 서류들을 모두 챙긴 후 관공서에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해도 또다시 기다려야 한다.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예약시간이 지난 듯하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분들은 자기들끼리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내가 보기엔 그저 잡담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국 같았으면 내가 먼저 다가가 이것 좀 처리해 달라고 말했을 텐데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그 누구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가만히 자기의 순서를 기다린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가 보다 생각한다.
'기다리는 사람도, 일하는 사람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어쩌다 내가 경험한 일을 이탈리아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스페인이 그래도 이탈리아보다는 업무처리 속도가 훨씬 빠른 편이라며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로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건 비교하기 나름인가 보다.'
스페인에 도착하고서 일주일이 지났다. 난 첫 스페인어 수업을 듣기 위해 아침에 홀로 집을 나섰다. 전철을 타고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거대한 스페인 국기가 겨울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아침이라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오히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어학원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레티로공원과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 걷는 동안 잔잔한 음악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상쾌하고 행복해진다.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즐길 수 있어 행복하다.'
고개를 조금만 위로 올려다보니 짙푸른 색의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주는 마음의 평온함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한국은 오후 5시쯤. 평소 같았으면 회사에서 오후 회의를 마치고 힘없이 자리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시간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이곳 스페인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좋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학원에 도착했다. 리셉션에서 수업과정과 필요한 사항을 안내받은 후 강의실에 들어서니 아직 아무도 없다. 잠시 후 몇몇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첫눈에 봐도 다양한 국적의 젊은 친구들이다. 수업 시작 전 난 같은 공간 속에 앉아 있는 낯선 이들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먼저 영어로 인사를 하고선 다른 학생들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대부분 다른 국가, 다른 직업을 가졌고 이곳에 온 목적 역시 다양했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친구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던 중 스페인어 선생님이 들어왔다.
스페인어는 한국에서 공부해 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매번 시작만 하고 도중에 그만두었다. 당연히 알파벳 읽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 내가 듣는 수업은 가장 기초 과정인 Level A1이다. 당연히 수업을 시작할 때 알파벳부터 가르쳐 줄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선생님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스페인어를 쏟아내고 있는데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멍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 다시 영어로 설명을 해주신다. 다행히 영어를 할 수 있는 학생들은 이해를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점점 고립이 되었고, 핸드폰으로 번역하느라 늘 정신이 없었다.
'영어를 할 수 있어 다행이다.'
3시간의 수업이 끝났다. 난 충격 속에 휩싸였다. 이제 어떻게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할까 고민해 보니 답은 스스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복습한 후 다음날 자신감을 가지고 학원으로 향했지만, 수업 시작과 함께 나의 당당했던 마음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정신없이 구글 번역기로 문장을 찾아내고, 수업을 따라가려고 고군분투했다. 또한 수업 중엔 하나의 주제로 학생들끼리 토론을 하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대화의 주제를 이해할 수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보니 나와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면서 스트레스는 쌓여 갔다. 불편한 마음을 가진채 수업을 듣고 있으니 점점 자존감이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중간 쉬는 시간에 나처럼 풀이 죽은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이들과 이야기하며, 고통의 아픔을 쏟아냈다. 그 친구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고 함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서로를 위안을 했다.
"난 수업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돼."
"나도 그래. 전혀 못 알아듣겠다."
"선생님은 왜 이렇게 빨리 말하는 건지.. “
그리고 나만 그런 게 아니란 걸 알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우리들의 핸드폰 배터리는 거의 방전되었다. 그리고 수업을 들었던 친구들과 나 역시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또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앞으로 이곳 생활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민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