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1년 살기 도전 중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당시 홀로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후 난 스페인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동기 녀석이 다른 부서에 근무하는 여직원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한다. 흔쾌히 승낙하고 난 후 첫 만남의 장소를 대학로 근처로 알아보았다. 어느 좁은 골목에 위치한 자그마한 스페인 음식점을 예약한 뒤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점심 약속이었기에 우린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스페인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제안하니 돌아온 대답은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저 근데 사실 밥 먹고 나왔어요."
당연히 점심을 함께 먹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대답을 듣고 나서 '나 까인 건가, 어이가 없네. 먹기 싫으면 말던가.'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식당에 도착해 내가 좋아하는 빠에야와 샹그리아를 주문하고서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사실 첫 만남이고 서로의 공통점은 회사이니깐 당연히 회사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우린 회사를 제외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던 중 어쩌다 서로의 꿈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저는 스페인 여행 후 스페인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스페인 여행에 관한 책을 써 보고 싶어요."
"그리고 스페인어도 배워 보고, 멋진 사진도 찍어 보고 싶어요."
나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공감하는 표정을 띠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첫인상에서 느껴지지 않던 관심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꿈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저는 음악을 좋아해서 언젠가 작곡을 해보려고 해요."
난 지금껏 살면서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작곡을 해보고 싶다는 대답을 듣고서부턴 그녀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이후 몇 번 더 만남을 이어가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데이트를 즐기던 어느 날 우린 종로의 어느 서점에 들렀다. 그리고 난 이제부터 스페인어 공부를 해보겠다며, 그녀가 보는 앞에서 '초급 스페인어 배우기' 책 한 권을 멋지게 집어 들었다. 또한 어느 날엔 그동안 내가 찍었던 사진들을 보여주었고, 그녀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한동안 우리 둘만의 즐거운 연애 시간을 가졌다.
결혼은 운명처럼 찾아온 사람과 사랑에 빠져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난 어쩌다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과 서로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에게 이끌렸다. 만남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이 사람과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결혼을 약속한 후 어느 날 그녀가 나를 위해 해주고 싶은 게 있다며 입을 열었다.
"결혼하기 전에 오빠를 위한 멋진 노래 한곡 작곡해서 들려줄게."
그 말을 듣고 나서 내 마음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올랐고, 어떤 노래를 들려줄까 내심 설레었다. 하지만 결혼 전 아내의 약속은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은 채 미결로 남아 있다. 결혼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주말 아침, 집안 청소를 하던 아내의 잔소리 겸 핀잔 섞인 목소리가 귓속에 날카로운 송곳처럼 꽂힌다.
"책장도 좁은데 보지 않는 스페인어책은 좀 버리면 안 돼?"
"쓰지 않는 사진기도 좀 정리해."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자동반사적으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를 하고 나섰다.
"이제 스페인어 공부하고, 사진 찍고 다닐 거니깐 그냥 놔둬."
아내의 잔소리에 문득 오래전 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책을 써보겠다고, 사진도 찍겠다며, 스페인어 공부도 하겠다고 말했지만 아무것도 실천한 게 없어 부끄럽기만 했다. 하지만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라 생각하니 조금 위안이 된다. 역시 꿈은 영원히 가슴속에 묻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초반에는 그동안 서로 숨겨두었던 발톱에 상처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래도 서로 여행 다니며 즐거운 신혼생활을 5년이나 누렸으니 나름 행복했었다. 어느 날 아이가 생기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을 때 아내로부터 임신 소식을 들었다. 기쁨도 잠시 평소처럼 산부인과에 들러 정기검진 도중에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태아의 심장에서 구멍이 발견되었습니다."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며, 소견서를 우리 부부에게 건넸다. 우리는 급히 서울로 올라와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태아가 자라면서 아주 가끔 구멍이 막히는 경우가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태어난 후 심장의 천공을 막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 말에 우리 부부는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슬픔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가 유일할게 할 수 있는 거라곤 간절한 마음으로 아이가 괜찮아지길 바라는 기도뿐이었다.
"차라리 저의 심장에 구멍을 내고, 아이 심장에 난 구멍을 막아주세요"
세상에 나온 아이는 예쁜 딸이었다. 그토록 기도했던 심장에 난 구멍은 여전히 메워지지 않은 채였다. 의사 선생님은 우리 부부에게 앞으로의 치료 방향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앞으로 6개월 관찰기간을 가져보고, 그래도 구멍이 막히지 않으면 심장시술 또는 개복수술을 해야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조그만 딸아이가 무서운 수술대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고 대신 내가 그 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몇 번을 빌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수술 방향을 결정할 심장 정밀검사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초조한 마음으로 딸아이의 심장 초음파 검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꽤 오랜 시간 동안 아이 심장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든 불안과 초조, 긴장은 이미 아내와 나의 온몸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다 의사 선생님이 몸을 돌려 말씀하시길
"내가 구멍 막아주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되겠네. 자연적으로 막혔어요."
구멍이 메워졌다는 행운 같은 의사의 말에 아내와 부둥켜안고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태아 때부터 큰 고비를 겪었기에 딸아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매일 정신없이 살다 보니 가끔 아내와 옛이야기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때의 아픈 기억은 잊고 지낸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많이 사랑한다. 그리고 아이가 많이 아플 때를 제외하고선 부모님이든 주변 도움을 받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돌보고 있기에 육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어린 딸아이는 우리 부부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항상 어린이집에 보내져야만 했다. 돌을 갓 넘긴 어린 딸아이를 앉고서 등원시키면 거의 1등, 하원할 땐 늘 꼴찌였다. 어쩌다 우리 부부 둘 다 늦게 퇴근하여 부랴부랴 어린이집으로 뛰어가면 홀로 창문에 몸을 기댄 채 엄마, 아빠를 기다리다 그토록 바라던 얼굴을 발견하고선 반갑게 웃으며, 손 흔들어 주는 딸아이 모습에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아이를 생각하면 칼퇴 후 어린이집으로 곧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손가락은 늘 PC 종료 버튼 위에 매번 대기하고 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들 바쁘게 일을 하고 있으니 눈치가 보인다. 이때 내 마음속엔 폭풍과 같은 갈등이 일어나지만 결국 마우스는 종료 버튼에서 멀어졌다. 그리곤 껐던 워드 화면을 다시 열고서 일하는 척을 한다. 그러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딸아이 얼굴이 계속 떠오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한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매일 반복될 뿐 멈춰지지 않는다.
놀랄만한 속도로 성장하는 딸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줄어만 간다. 그리고 딸아이는 홀로 어린이집에 남겨진 채 창밖만 바라보면서 엄마, 아빠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반복될 거라 생각하니 마음속에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자꾸만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차 한잔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가 좀 더 크기 전에 우리 같이 회사를 1년만 쉬는 건 어떨까?"
"좋아."
"그럼 지금 있는 곳이 아닌 아주 먼 곳으로 가보는 게 어때?"
"우리 예전에 각자 어학연수 했던 캐나다에 가보면 어떨까? 거기 좋았잖아."
"너무 좋다. 그래 캐나다든, 미국이든, 해외 어디든 나가서 1년 살아보자"
"딸아이에게도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잖아."
"그런데 지금 당장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지?"
용기의 칼을 뽑는 그날을 기다린다.
세르반테스 작품 속 돈키호테는 풍차를 향해 칼을 뽑고 달려간다. 미치고, 어이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매번 칼만 허리에 차고서 뽑지 못하는 것보다 허공에라도 휘두를 수 있는 용기라도 가져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돈키호테와 나는 서로 비슷한 처지여서 공감이 갔다. 누군가는 우리 가족 모두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건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은 소설과 다른 결말로 마무리될 것 같은 느낌이 찾아온다.
'해외 1년 살기' 꿈을 가졌으니 언제라도 운명의 시간이 다가올 때를 대비해서 사전에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용기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준비할 것들이 아주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1년 동안 사용할 자금 즉, 돈을 모아야 한다. 나머지 준비들은 그 이후에 해도 될 거라 생각하고 우선 돈 모으기에 집중했다.
우리는 평소 가진 돈이 많지 않다 보니 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재무 상담을 받았다. 보통 재무 상담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다. 지출 관리를 할 수 있어 낭비하는 돈을 줄일 수 있고, 미래에 목돈이 필요할 때를 대비하여 효과적인 저축방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2021년 1월 재무 상담을 통해 우리 가족의 꿈을 위한 자금계획을 세웠다.
'최소 3년간 매월 200만 원씩'
앞으로 3년간 매월 꾸준히 저축하고 목표했던 금액을 다 모으게 된다면 그토록 가지고 싶어 하던 용기의 칼을 내 손안에 거머쥘 수 있다. 그리고 운명의 기회가 나에게 찾아왔을 때 멋지게 휘둘러 볼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우리 부부는 소비를 줄이고자 수시로 찾아오는 지출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기로 했다.
"비싼 음료 대신 그냥 아메리카노 마시자."
"저녁 외식 말고 집에서 밥 해서 먹자!"
"옷장에 널린 게 옷이잖아. 정말 필요한 거야?"
처음에는 평소 하던 지출을 한 번에 줄이고자 하니 온갖 불편한 마음이 매 순간 찾아왔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니 적응이 된다. 그래서 커피가 생각날 때면 가장 저렴한 곳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그리고 집에서 음식을 자주 하다 보니 요리실력이 점차 향상되어 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가 사는 동네는 시골이라 배달음식을 시켜 먹을 곳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불편함에 익숙해지니 더 이상 힘들지 않고 마음은 편안해진다.
우리 가족은 민달팽이다. 내 등엔 짊어져야 할 집이 없다.
누군가는 어떻게 매달 그 큰 금액을 저축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에겐 큰 대출을 끼고서 구매한 집이 없다. 따라서 대출 금액이 많지 않았기에 우리 부부가 받는 월급에서 지출을 최대한 줄인다면 저축하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저축을 시작한 지 어느덧 시간은 3년이 지나갔고, 우리 부부는 목표로 정한 금액을 모을 수 있었다.
'돈이 있으니 용기가 생긴다.'
돈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다. 꿈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용기와 도전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돈도 있어야 한다. 더욱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하다. 꿈을 위해 필요한 자금은 모았으니, 이제부터 '해외 1년 살기'를 위한 용기를 내면 된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까?'
2023년 뜨거운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8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한 주 동안 쌓였던 먼지들을 털어내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세상 속 이곳저곳을 들락거리며 쉬고 있었다. 우연히 항공권을 검색하다가 스페인행 항공권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다. 옆에 앉아 있던 아내에게 항공권 예매 창을 보여주며 말문을 때어본다.
"지금 스페인 항공권을 저렴하게 예매할 수 있는데, 우리 그냥 스페인으로 1년 살기 하러 갈까?"
운을 띄어보았다.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아내는 좋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우린 많은 고민 없이 돌아오지 못하는 스페인행 ‘편도 항공권’을 예매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해외 1년 살기’ 장소는 스페인이 되었다.
예언된 것인가?
운명처럼 눈앞에 나타났고, 거부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어느 일요일 아침 '스페인 1년 살기'를 위한 꿈의 D-day를 알리는 시계는 운명처럼 켜지게 되었다. 간혹 지인들로부터 왜 스페인으로 결정했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대답을 망설였다. 왜냐면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운명처럼 그냥 그때 우리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스페인 1년 살기를 결정한 후 난 아내에게 우리의 미래는 이미 예견된 운명인 거 같다고 운을 뛰우며 대화를 나눴다.
"스페인으로 결정하게 된 건 예견된 운명 같지 않아?"
"그럴지도."
"우리가 처음 만난 곳 기억나? 그 스페인 음식점 말이야."
"살짝 신비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다시 찾아가 보니 없어져서 찾을 수 없었잖아."
스페인으로 결정하게 된 건 우리의 운명이다. 아내와 첫 만남의 장소는 대학로 어느 골목에 위치한 스페인 음식점이다. 그곳의 기억은 작고 아담한 규모에 더 작은 창문으로 햇살이 간신히 비쳤지만, 테이블 위에 켜진 조명등이 필요할 정도로 어두웠다. 그리고 손님은 아내와 나 단둘뿐, 테이블에 앉으니 식당은 꽉 찬 분위기로 더 이상 손님이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기억을 되돌려보니 그곳의 느낌은 마치 예전에 읽었던 책 "나미야 잡화점의 기억"과 같이 신비한 일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였다. 그 장소에서 신비한 묘약처럼 붉고 달콤한 샹그리아 한잔을 마시며, 서로의 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좋아졌다. 나의 꿈은 '스페인 관련 책‘을 쓰고 '스페인어 공부'도 하며 '사진 찍는 꿈', 그리고 아내의 꿈은 '작곡'이었다. 우린 서로 다른 꿈에 이끌려 결혼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10년 후 지금 여기 스페인에서 서로의 꿈이 이뤄지는 신비함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