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스페인 1년, 글쓰는 아빠가 되다 03화

라이킷 22 댓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Hidi Sep 07. 2024

마지막 출근
그리고 '스페인 1년 살기'

스페인 1년 살기 도전 중

함께 즐겨야 할 시간이 부족해!

문득 일상 속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계산해 보았다.

하루 24시간 = 회사 11시간 + 숙면 8시간 + 여유시간 5시간
* 회사 11시간 = 근무 8시간 + 점심 1시간 + 출. 퇴근 2시간

즉, 나에게 주어지는 여유시간은 집안일 포함 5시간뿐이다.

딸아이는 어린이집에서, 그리고 우리 부부는 같은 회사지만 다른 부서에서 하루의 3분의 1 이상을 서로 떨어져 지낸다. 그리고 잠자는 시간 3분의 1을 빼고 나면 우리 가족이 함께 먹고, 놀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8시간이 채 안 된다. 거기에 출퇴근 준비하는 시간을 빼고 나면 하루 5시간이나 될까? 하루동안 우리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채 20퍼센트도 안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만약 회식이나 야근을 한다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

하루에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은 5시간이 채 안된다.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에 나의 일상이 얽매이다 보니 그만큼 사랑하는 딸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줄어 갔다. 지난가을 어느 날, 붉게 물든 단풍잎을 따려고 팔을 뻗는 딸아이의 작은 손이 마치 단풍잎처럼 작게만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훨씬 커져버린 아이의 손을 보고 있으면 언제 이렇게 컸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아쉬움이 느껴질 때가 참 많다. 그리고 몸이 작고, 부모의 손길을 많이 필요했던 딸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나 어린이집과 놀이터를 휘젓고 다녔고, 언젠가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아졌으며, 자신의 감정을 더욱 조리 있게 잘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가 느끼는 시간의 속도와 딸아이가 커가는 속도는 너무나 다르다.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더라도 공백이 느껴질 만큼 딸아이는 빠르게 성장한다. 소중한 딸아이와 매일 함께 하면서 그동안 벌어졌던 시간의 빈틈을 채우고 싶다. 그리고 부족했던 우리 가족의 추억 이야기를 더 많이 기록해 보고 싶다.

급격한 변화 속,

숨 쉴 시간이 필요하다.

'해외 1년 살기' 꿈을 이루기 위한 3년이라는 준비시간 동안 우리 가족의 삶에 많은 변화들이 찾아왔다. 마주하게 된 현실에 적응하느라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꿈은 잊고 지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더욱 줄어만 갔다. 거기에 더하여 누적되는 회사 업무 스트레스로 쉬고 싶은 마음은 점차 강해졌다. 처음에는 딸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목적이 컸지만 지금은 우리 부부가 잠시 회사를 떠나 쉬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꿈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이유가 생겼고, 더욱 간절해졌다.

해외 1년 살기를 위한 준비 시작 후 1년의 시간이 지나갈 때쯤 우리 부부는 회사에서 동시에 승격을 하게 되었다. 승진의 기쁨도 잠시 나는 타사업소로 인사발령이 나서 이동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어린이집이 직장 내에 있어 우리 가족 모두가 지금껏 함께하던 출퇴근길이 달라져야 했다. 다행히 주말부부를 해야 할 만큼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변화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나의 출근 시간은 빨라졌고, 퇴근은 더욱 늦어져 딸아이 등하원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곧 딸아이가 어린이집에 혼자 남겨지는 일이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승진으로 높아진 직책과 새로 맡게 된 업무는 우리 부부에게 예전보다 더 많은 책임감과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회사는 우리에게 더 많은 헌신을 요구해 왔다. 우리는 마주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상처를 주거나, 반대로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변화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내 마음엔 평온이 찾아오지 않았다. 불안하고 지친 마음은 곧 아내뿐만 아니라 딸아이게도 표출되었다. 예를 들면 어린 딸아이가 가끔 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서 마음대로 행동할 때마다 아이에게 좋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도 화를 내거나, 잔소리를 했다. 그것이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딸아이는 역시 반복되는 나의 잔소리에 반항의 의미로 "아빠 싫어!"를 자주 외쳤다.

'딸아이의 말이 내 가슴에 꽂히면 슬픈 마음이 들었다.'

'왜 딸아이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매일 내가 가진 에너지의 대부분을 회사를 위해 쏟아내고서 집으로 돌아오면 딸아이와 놀아줄 힘은 없고, 아이에게 잔소리를 쏟아낸다. 그리곤 빨리 잠재우려고만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 씁쓸해진다. 함께 웃고 떠들며 뛰어다니면 즐겁고 행복한데 자꾸 누워 쉬고 싶기만 하다.

'늙어가는 몸뚱이야. 제발 힘 좀 내어주라.'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결론은 결국 한 가지였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까?'

'남과 비교해서 더 잘하려고 일에 몰두하다 보니 우린 회사에 매몰되고, 나의 에너지는 점점 고갈된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상대를 위해 배려할 여유도 없다.'

'차츰 이곳 사회에 적응하다 보니 내가 볼 수 있는 건 회사 속 작은 세상뿐이다.'

우리에겐 잠시 쉼이 필요해!

'보랏빛 향기에 취해 보다.' 스페인 라벤더 들판에서 - Hidi 作.

가족과 나를 위한

변화의 종을 울렸다.

꿈을 위해 저축을 시작한 지 거의 3년이 다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통장에 얼마나 모였을까 궁금해 확인해 보니 어느새 목표했던 금액이 들어 있었다. 이제 언제든 용기만 낸다면 그동안 멈출 수 없을 것 같던 삶에 잠시 '쉼'을 선물할 수 있다.

우연히 솟아난 용기,
앞을 막고 있던 두려움의 장벽을 한 칼에 베었다.

무더운 8월 어느 일요일 오전, 운명처럼 내 손에는 스페인행 편도 항공권이 주어졌다. 손안에 든 휴대폰 화면 속 항공권에는 우리 가족을 데려다줄 장소, 떠나는 날짜 그리고 시간이 찍혀 있었다.

ICN(서울/인천) - MAD(마드리드)
2024. 1. 30.(화) 12:45 - 2024. 1. 30.(화) 19:30

출발까지 약 5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어떻게 보면 긴듯하면서도 짧은 시간이다. 떠날 날이 정해진 후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어깨의 짐들을 하나둘씩 내려놓았다.

'왜냐면, 난 떠날 사람이니깐.'

'하하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스페인 1년 살기'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기 시작해야 한다. 준비 사항들을 하나둘 꼼꼼히 정리해 본다. 스페인비자받기, 살 집 구하기, 어학원 등록하기, 딸아이 유치원 알아보기, 차량 구하기, 지출계획, 짐 싸기 등 생각했던 것보다 많다. 그중에 다시 우선순위를 정해보니 당연 1년간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방법을 알아봐야 한다.

보통은 비자를 발급받은 후 항공권을 예약한다. 우린 반대로 항공권을 예약하고서 비자를 준비했기에 비자에 대한 리스크가 있었다. 이럴 땐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 스페인 전문 유학원을 검색해 보니 2곳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비자 발급이 거부된 적이 없다는 후기를 보고서 망설임 없이 한 곳에 연락하였다. 그리고 알려주는 것들을 하나둘씩 준비하다 보니 우리 가족 모두 빠르게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비자를 준비하면서 유학원 담당자분과 이야기를 했던 것 중에 기억나는 게 있다.

"보통은 비자를 먼저 받고서 항공권을 예약하는데, 순서가 바뀌었네요."

그렇다.

'만약 항공권을 먼저 예약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다시 한번 항공권을 덜컥 예약했던 그때를 생각해 본다. 갑자기 솟아난 용기 덕분에 고민 없이 바로 선택한 우리의 결정이야말로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싶다.

비자 준비에 필요한 서류들과 어학원 등록 같은 사항들은 유학원에 전적으로 맡긴 채(비자는 12월 초에 순조롭게 발급받았다.) 우리 부부는 현지에서 머물 집, 아이가 다닐 유치원, 우리가 타고 다닐 차량, 그곳 생활에 필요한 소비계획, 스페인으로 가져갈 물건 정리 등 나머지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준비했다. 어느덧 5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1년간 휴직 좀 할게요.

우리 부부는 약 13년 동안 쉬지 않고 다니던 회사에서 잠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아내와 난 각자 소속된 부서에 내년 1월부터 휴직할 계획임을 미리 알려야 한다. 우리 회사는 12월 말부터 인사이동이 시작되므로 현재 담당하고 있는 업무의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고 후임자를 구하려면 지금 말해야 한다.

"저 내년 1월 초부터 1년간 휴직 좀 하려고 합니다."

"갑자기 왜 휴직하려고?"

"더 늦기 전에 딸아이와 시간을 많이 가져보려고요."

"휴직하고 뭐 할 건데?"

"가족과 함께 스페인 1년 살기 하러 갑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부럽다며 잘한 결정이라고 응원해 주는 분들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반응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충분히 공감 가는 것이었다.

"지금 한창 열심히 일해서 좋은 자리로 이동하고, 다음 승격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데.."

아내도 나도 '지금 이렇게 인정받고 일 잘하고 있는데 지금 떠나는 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꿈을 가졌던 이유인 딸아이를 떠올려보니 아쉬움은 금세 사라졌다. 그래서 계속 흔들렸던 우리 부부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스페인으로 떠나는 날, 딸아이가 당당하게 우리 앞에 섰다.

헤어짐

시간은 흘러 어느덧 스페인으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영원히 떠나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친하게 지낸 이들에게 잘 다녀와서 다시 연락하겠다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우리 가족의 도전에 기꺼이 응원을 아끼지 않는 지인들과 기분 좋은 헤어짐을 하였다.

'다시 만날 걸 알면서도, 헤어짐은 언제나 가슴속에 아쉬움으로 차오른다.'

딸아이도 지금껏 다녔던 어린이집 선생님 및 친구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 등원을 하고 하원시간이 되어 딸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 아이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땐 모든 아이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딸아이를 안아주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던 건 왜일까?'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보니 딸아이 가방 속에는 처음 보는 작은 책이 하나 들어있었다. 책 안에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마음이 담긴 손편지와 그림들 그리고 함께 즐거웠던 시간을 담고 있는 사진이 담겨있었다. 그것을 펼쳐보니 딸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얼마나 행복하고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고, 친구들과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