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칼의 노래>: 비극이 삶에게

by 시언


내게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누군가 독서에 관해 물을 때는 설명이 길어질까 그냥 취미다라고만 답한다. 난 독서 자체를 즐기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면 재미가 붙는 경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삶을 견디기 위함이. 하루하루가 즐겁고 선명할 때 나는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내 독서량은 그 시기가 불행하고 고통스러울수록 늘어났다. 살면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기는 군 복무기간이었다. 21개월 동안 총 127. 그때의 나는 많이 아팠던 모양이다.


이 말을 들은 몇몇 지인들은 이등병 때부터 한 달에 책 6권 읽을 정도면 요새 군대 개판이라며 비아냥거린다.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던 시간은 선임들이 PX나 싸지방(인터넷이 가능한 부대 내 시설)에 갔을 때나, 주말 오침(낮잠) 시간 때뿐이었다. 그때를 제외하고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때는 화장실 변기 위 정도였다. ‘그게 군기가 빠진 거지 뭐냐라고 반문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군기 빠진 막내를 번번이 눈감아 준 선임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그중에서도 김훈의 <칼의 노래>2 회독, 3 회독을 넘어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베껴 쓰기도 했던 책이다. 전역 년도조차 가물가물한 지금 새삼스레 자문해 본다. 그때 이 책이 절망한 이등병에게 건넨 위로는 무엇이었는가.

‘포구로 몰려온 적들은 산속으로 숨어든 피난민의 아녀자들까지 모조리 죽이고 코를 베어갔다. 피난민들은 다만 얼굴 가운데 코가 있기 때문에 죽었다’


<칼의 노래>피비린내 자욱한 전란의 한가운데를 이순신의 시점으로 응시한 작품이다. <칼의 노래> 속 이순신은 피 끓는 애국심과 희생정신으로 뭉쳐진 선입견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내면은 섬뜩하리만치 가라앉아 있다. 그는 암세포가 투된 쥐를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미친 수라장(修羅場)의 정면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 조선 수군들은 물 위에 떠다니는 아군들의 시체를 갈고리로 찍어 건져 올려서 갑판 위에서 목을 잘랐다

-김훈, <칼의 노래>


아군이 선이고 적군은 악이라는 식의 이분법은 역사가들의 펜 아래에서 성립되는 이상주의다. 선과 악이 분별없이 뒤섞인 최전선에서 조선의 유일한 희망 이순신은 예감한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전쟁에 임하는 한 이길 수 없다. 피투성이로 쓰러진 적병들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식의 감상은 사치다. 적은 적일 뿐이고, 적을 격멸하는 것만이 군인 된 자의 도덕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이기 이전에 군인이어야만 했다.


사막의 모래처럼 건조한 단문들을 읽다 보면 독자의 생각은 자연스레 한 줄의 의문으로 귀결된다.


이 비극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마 학자들이라면 전쟁을 통한 양국의 극단적 문화 교류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왜란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전통 상차림에서 고추는 영영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김훈이 가리키는 비극의 이면에는 더 깊고 삼엄한 생의 진실이 숨어있다. 그건 바로 비극의 이유 없음’이다.


원통한 자는 그 이유를 찾아 헤매지만, 때로 그딴 건 없을 수도 있어.’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김훈, <칼의 노래>


콧노래가 절로 나올 만큼 일이 술술 풀릴 때는 누구도 원인이나 의미 같은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행운에 원인이 있건 없건 알 바 아니다. 행복이란 그 자체로도 충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비극은 다르다. 불행의 아가리 속으로 추락한 사람들은 신에게, 혹은 세상에게 비극의 원인을 절박하게 캐묻는다.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해야 하느냐고.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그들은 절규처럼 되묻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 비극에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없다. 비극은 일어났을 뿐이고, 그는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내 군 복무 시절도 그랬다. 극도로 경직된 군대문화에 염증을 느낀 나는 그들의 세계에 스며들기를 거부한 채 내 비극의 이유와 의미를 탐색했다. 모두가 잠든 주말 오후의 내무반에서 홀로 소리 죽여 울었다. 이때 <칼의 노래> 속 김훈은 내게 이순신의 목소리를 빌려 단언했다. 고통과 비극에 이유는 없다.


포기하면 편해라는 유행어는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비극을 내 삶의 일부로 끌어안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람 냄새라곤 영영 맡을 수 없을 거라 믿었던 군대가 사람 사는 곳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무시로 나를 갈구던 선임들은 물론 동기, 후임, 간부까지. 모두 저마다의 비극을 모래주머니처럼 매단 채 묵묵히 생을 견디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나는 자의식 과잉의 중학생처럼 오직 나만이 엄청난 비극의 주인공이라 확신해왔던 것이.


마지막 책장을 덮은 나는 p.x 에서 펜과 노트를 구입했다. 비극에 이유 따윈 없다는 한 노 작가의 진술이 믿어질 때까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가슴에 새겼다. <칼의 노래>를 필사한 후 내 독서량은 현저히 줄었다. 책을 읽는 대신 선, 후임들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함께 아이돌 그룹 무대를 보며 웃고 떠들었다. 비극은 삶의 일부일 뿐 이유 같은 건 없다는 생의 진실을 망각할 때마다 나는 <칼의 노래> 필사집을 펼쳐든다. 어느새 꾸깃하게 바랜 글자들을 읽고 또 읽는다. 그렇게 또 생의 한 고비를 간신히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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