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환상통>: 가지고 싶은, 곁에 없는.

세상이 비웃은 사랑

by 시언


냉소의 대상이 되는 사랑들이 있다. 이를테면 유부남 강사와 러시아로 떠난 여대생의 사랑 같은 것들. 그들의 사랑은 호사가들의 하룻밤 술안주가 되어 소비된다. 그런 건 한 철 불장난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완고하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의 확신과 비난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췄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여기 불장난으로 분류되는 또 하나의 사랑이 있다. 과거에는 '오빠부대', 근래 들어서는 '빠순이'로 불리는 이들의 사랑이 그렇다. 아이돌 스타의 팬인 그들은 가수의 음악방송 출퇴근길은 물론 지방 행사 일정까지 쫓아다니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오빠'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영접"하고자 사인회 당첨권이 걸린 CD를 수십 장씩 사들이는 그녀들을 사람들은 마음껏 비난하고 비아냥거린다. 나보다 아둔하고 비이성적인 인간들이 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얼마간의 자부심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머니투데이

'그들은 한순간이나마 우리의 연인이었다. 선팅된 차에 올라타 가버리는 연인, 창문을 열어주지 않는 연인, 그들을 위해 우리는 머리를 빗고 화장을 고쳤다. 그 결과 누가보면 세게 맞은 것 같은 얼굴을 갖게 되었음에도'

- 이희주 『환상통』 61p (E-BOOK 페이지이므로 종이책과는 상이할 수 있습니다.)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는 하나의 레퍼토리가 매년 반복된다. 수상자로 호명된 아이돌 그룹이 사방을 향해 인사하며 무대로 향한다. 팬들은 그들이 마이크 앞에 서는 순간까지 악에 가까운 환호성을 멈추지 않는다.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을 흘리는 팬들도 여럿이다.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시상대에 오른 가수들은 오늘이 있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한다. 기획사 대표와 담당 이사, 스타일리스트와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의 감독 등이 주로 호명된다. 소감의 마지막은 대부분 '사랑하는 팬 여러분'에 대한 헌사로 끝난다. 이른바 '빠순이'들의 존재론적 비극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오빠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크든 중요하지 않다. 오빠들은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줄 수 없다. '너를 사랑하는 '로서가 아닌, '팬 여러분들'이라는 복수형 단어 안에서 그녀들은 살아야 한다. 방 안을 채운 브로마이드를 보며"어 차피 걔들은 너 존재도 몰라"라고 비꼬는 게 다분히 악질적인 발언인 것도 그래서다. <환상통>이 응시하는 지점도 그곳이다. 이 작품은 닿을 수 없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돌아보니 만옥 씨는 눈을 차분하게 바라만보고 있더군요. 손에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쥐었다가 빈손을 펼치길 반복하면서. 마치 그걸 잡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런데 그게 가능할리가 있겠어요. (중략) 그러나 만옥씨는 그걸 외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다보면 단 하나의 눈송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 이희주 『환상통』 159p


"씨발 사랑해!!" 라고 외치는 팬들 중 하나로서만 정의되는 자들의 내면을 작가는 치열하게 탐색한다. 곁에 없는 것, 만질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는 것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불가능한 것을 사랑해 본 적 없는 내게 그들은 하나의 난제였다.


작가는 세상이 비웃는 그녀들의 사랑을 변호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이것은 사랑인가, 사랑이 아닌가. 어쩌면 판단은 타인의 몫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는 정상적인 사랑이고 어디부터는 '골 빈 인간'들의 불장난으로 선을 긋는 건 또 하나의 폭력이다.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타인의 사랑을 냉소할 권리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책을 읽는 내내 상념은 멈추지 않았다.


<환상통> 속 그녀들이 끝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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