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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은 왜 하는가? feat 계룡산

삶에서 등산과 같은 일시적 쾌락을 추구하는 이유

by 일반토마토

계룡산에 다녀왔다.
하지만 이 글은 계룡산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조금 더 본질적인 질문, ‘등산은 왜 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장기하의 「등산은 왜 할까」라는 곡이 있다.
그 가사는 내가 품었던 의문과 꼭 닮아 있다. 정말, 등산은 왜 할까?
어차피 내려올 거, 뭐하러 힘들게 오를까? 시간과 중력을 거스르며 감수해야 하는 그 고통을 무릅쓰고도 산을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치를 즐기기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고통은 그 대가로 충분할까?
더 멋진 풍경을 위해 오랜 시간 등반하고 나면 남는 건 종종 후유증이다.
저린 다리, 하루 이틀은 운동도 못 하고, 그저 감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럴 때면 가끔 후회한다.
‘차라리 가지 말걸...’

누군가는 산이 내게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유증에 시달리는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냥 오지 말지... 부상과 통증을 남기려거든,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으로만 있어주지 그랬어.’

그렇게 깊은 근육통만 남긴 계룡산.
그럼에도 나는 또다시 그 풍경이 그립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떠올렸다.
반복되는 일상 속, 작고 조용한 기쁨을 누리는 주인공 히라야마의 삶.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아무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는 삶 자체에서 오는 평온.
에피쿠로스 학파의 “고통이 없는 상태 = 최고의 쾌락”이라는 철학을 실천하는 삶.

하지만 그에게도 어느 날 조카가 찾아오고, 조용했던 일상에 파문이 인다.
그 만남은 히라야마에게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가 잊고 있던 또 다른 행복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특별함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조카는 떠나고, 히라야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가 느낀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겪어버린 행복과, 그것을 잃은 상실감은 그의 아타락시아 를 뒤흔든다.

마지막 장면의 그의 표정.
자족과 갈망, 평온과 동요가 공존하는 얼굴.
그는 다시 일상의 행복을 살아가지만, 더 이상 그곳엔 ‘그것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행복, 특히 ‘강렬한 행복’은
시간에 의존하고, 우연에 기대며, 늘 사라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사랑, 여행, 성공.
찬란하지만, 사라지면 기억은 고통으로 변하기도 한다.
니체는 이러한 감정을 “일시적 쾌락”이라 불렀고,
오히려 ‘영원회귀’를 견딜 수 있는 감정만이 진짜 행복이라 했다.

그렇다면 묻고 싶어진다.
그런 강렬한 행복은 진정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왜 나는 그런 감정에 흔들리고, 또 갈망하는 걸까?

아마도 살아있다는 감각 자체가 ‘흔들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진동을 느끼고 싶은 욕망.
언젠가 끝날 수도 있는 관계, 실패할 수도 있는 도전,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려는 마음.

그것이 청춘이고, 생의 본능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묻는다.
등산의 후유증 속에서 되뇌이듯, 다시 불러본다.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높이 오를까?~

이렇게 다시 외로울 바에야~
애초에 곁에 아무도 없으면 좋겠어.”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뭐하러 힘들게 높이 오를까?
어차피 내려올 걸 알면서도
뭐하러 그렇게 높이 오를까?

술은 또 왜 그리들 마시는 걸까?
뭐하러 몸 베려 가면서 노나?
어차피 깨버릴 걸 알면서도
뭐하러 그렇게 취하려 들까?

내가 지금 마음이 차가운 건
따뜻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그냥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다시 슬퍼질 바에야
애초에 기쁘지도 않았으면

나는 그냥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다시 외로울 바에야
애초에 곁에 아무도 없으면 좋겠어

내가 지금 혼자라 느끼는 건
애초에 니가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그냥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다시 슬퍼질 바에야
애초에 기쁘지도 않았으면

나는 그냥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다시 외로울 바에야
애초에 곁에 아무도 없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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