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편지
십수년도 넘게 배우고 가르쳐온 사람의 눈에
강의실 배치를 이렇게 하니 훨씬 안정적이더라고요-
미리 준비해야 할 수업자료는 없나요?
뭐 필요하신 거 없으세요?
잊을 만하면 쫑알대며 챙겨주려는 조교가 얼마나 귀여웠겠어요.
정작 중요한 일은 선생님이 다 해버렸는데 말이죠.
그때도, 그때의 나도, 당신도 잊은 채 지내다가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학생으로 당신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참 부끄러웠어요.
당신은 "저번이랑 크게 다를 거 없는 강의"라고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솔직히 저번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강의이긴 했지만,
나는 어느샌가 저 멀리로 뒷걸음쳐버린 도망자였거든요.
당신은 스스로를 느릿느릿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에겐 늘 그 자리를 지키는 멋진 사람으로 보였거든요.
나는 당신의 단어 하나하나를 귀담아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어요.
한 번의 강의를 위해 얼마나 완벽한 시나리오를 짜는지, 얼마나 많은 예시를 업데이트하고 고민하는지.
그래서 수업을 듣는 내내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어요.
이렇게 적어놓은 노트도 책장 속에 갇혀 한참 후에나 빛을 보려나, 그조차 안되려나.
하는 생각 때문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필기만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