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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ey Mar 02. 2021

음, 제법 나사다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서른 번째 편지

언젠가부터 부품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름말고 번호로 불리는

자리에 있어도 없어도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나사가 되고 싶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주 작아지려면 정말 큰 곳에 가야 하겠더라.

내가 원하는 만큼 하찮아지려면 대체 얼마나 넓은 곳에 던져져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큰 곳에 가고 싶은 것도 아닌데 말이지.


오늘 내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팀이 교체되었다.

계약 종료, 재입찰, 그런 깔끔한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기존 인력이 짐을 싸던 지난주, 신규 인력이 짐을 푸는 이번주 내내 소란스러웠는데

지난주엔 조금 슬펐고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 내내 시끄럽네. 라고 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나 너무 매몰찬가? 하는 마음도 잠시

음, 제법 나사다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라고 다시 생각했다.

사무실이 곧 조용해지고

매일 반복되는 일거리들이 조금씩 맞물리면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제와 다를 거 하나 없는 날이었다.


출근길에 같은 버스에서 내린 아저씨가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찍더라.

나도 그제서야 하늘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따뜻하고 청명한 날이었다.

나보다 숱하게 헤어지고 만나는 인사를 반복했을 이름모를 그 분에게도

매일 바뀌는 하늘은 조금씩 다른 느낌을 안겨주는건지.

그런데 오늘의 나는 그 하늘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나, 나사가 되었네.

꿈을 이룬 멋진 청년이 되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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