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기억과 부르심)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니라. (출 2:24)
― 한 사람의 작은 돌봄이, 평생의 지팡이가 된다.
기억 (記憶 memory)의 의미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뇌에 남은 흔적이자, 존재의 뿌리이며, 나의 정체성 그 자체다.
지금 길 위에서 길을 잃은 나는, 누구보다도 기억을 붙잡고 싶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은 훅하고 가슴을 달구며 치솟았다."
그때마다 나는 추억을 더듬었다.
다시 시작하려면, 먼저 좋았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학교 선생님의 손길
내가 처음 ‘돌봄’을 경험한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1978년 교회학교였다.
서울 성북구 장위동, 전봇대가 세워지고 집들이 들어서던 개발의 한복판.
도시로 상경한 부모님은 공사판과 파출부 일을 오가며 여섯 남매를 키우느라 분주했다.
집은 손이 부족했고, 아이들은 서로를 돌보며 살아야 했다.
그런 내게 교회학교 선생님이 다가왔다.
흙장난에 빠져 있던 아이 하나를 발견해 교회로 데려가셨다.
웅장하게 높이 솟은 붉은 벽돌 건물, 가득 찬 아이들의 웃음소리, 교회는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남겨진 흔적
거의 50년이 흘러 그 교회를 다시 찾아 보았다.
삶의 덜컹 거리는 순간 마다 자주 등장했던 그 빨간 벽돌로 지어진 "세신교회"
설마 하는 마음과 두근거리는 기대를 안고 기억 속 웅장했던 예배당을 검색했다.
아! 그 예쁘던 교회는 자취를 감추고, 상가 교회로 바뀌어 아파트 숲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실망스러웠지만,
교회 연혁의 오래된 사진 속에 분명히 그 기억속 교회가 떡 하니 자리 하고 있었다.
나에게 기억을 만들어준 그 자리.
그리고 떠오른 장면 하나.
시골로 이사하던 날, 새벽에 찾아온 교회 학교 선생님이 어머니께 당부 하던 그 청각의 자극.
"꼭 교회에 보내 주세요. 혼자서라도 다닐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문연이는 교회를 꼭 다녀야 합니다."
나의 어머니는 훗날 이 일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날 그분의 말씀이 네 인생을 바꾸었다. "
정말 그렇다.
그 기억은 신앙의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들어 세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사랑의 기억
고통을 이기는 방법을 말하는 책과 이론이 수두룩 하게 널려있다.
그래서 오히려 길을 찾는데 더 오랜 시간과 고민이 드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고통이 찾아오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것도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살 힘 보다는 죽을 힘을 짜낼때가 훨씬 더 많음을 알게 된다.
그럴 때면 내 깊은 속으로 숨어들어, 따뜻한 손 하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 기억이 나를 살렸고,
그 기억이 나를 일으켰다.
나를 나답게 다시 일어서 걷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신명기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토요일에 모여서 숙제도 함께 하고
주일이면 온 동네를 다니며 아이들을 깨워서 교회로 향했다.
"성탄절 무대에 섰던 그날, 처음으로 주목 받았던 그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와는 다른 세계를 사는 듯 가죽 코트를 입고 바이올린을 켜던
부잣집 도련님 같았던 그 요셉은 지금 어떻게 살아 가고 있을까?
무엇보다 나를 위해 그 새벽에 어머니를 만나러오신 그 선생님의 이름이 궁금하다.
말씀 그리고 그안의 작은 에피소드
얼마 전, 이 글을 브런치에 발행한 후 뜻밖의 댓글을 받았다.
"향상 작가님 안녕하세요?
추운 겨울, 따뜻한 온기 한 움큼 같은 유년부 시절 이야기에 감동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 향상님 이야기를 전하며 목사님과 성도님들 40여 년 전으로 여행을 다녀왔답니다.
세신교회를 통해 행복했던 시간을, 이렇게 다시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회복의 통로가 되시길 응원하며, 주님의 은혜가 넘치시길 기도 드립니다."
"그 댓글을 읽는 순간, 깨달았다.
어린 시절 내게 건네진 작은 돌봄이 오늘도 살아 흐르고 있음을.
기억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세월을 넘어 오늘을 비추며, 또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돌봄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