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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상 Mar 11. 2024

돌아봄!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걷다가 힘들어 잠시 쉬는 중입니다. 3화-5)

출애굽기 2 장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기억 記憶 memory

뇌가 받아들인 인상이나 경험과 같은 정보를 간직하고 또 그것을 다시금 떠 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기억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닌 듯 여겨진다.


길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금의 나는 어쩌면 다른 어느 때보다 깊은 신음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혼란 그리고 그 혼란이 가져다주는 고통은 깊은 한숨으로 저 뱃속 아래에서  뜨겁게 올라와 콧김과 한숨으로 뿜어진다. 마치 증기차가 내뱉는 연기처럼 그렇게 소리를 내면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하니 그렇게 살아가는 속은 또 얼마나 뜨겁게 차 올랐을까?


그래서 다시금 시작하고자 기억을 더듬는다. 상황의 한계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나를 돌봄 (care) - 먹고 그리고 숨 쉬고 그리고 걸어야겠다.

나를 돌아봄 (look around)  - 하늘과 산과 바다와 그리고 함께한 사람들을 보아야겠다.

사랑을 기억함. ( remember) - 가족과 교우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추억해야겠다.

그리고 나아감 (progress) - 기다림과 인내로 한걸음 씩 다시 나아가야겠다.


그렇게 시작하고자 다짐한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어린 시절의 교회학교 선생님이었다.

국민학교 1학년이던 1978년 유년시절 그때 서울이라는 도시는 한참 개발이 진행 중이었다.

전봇대가 세워지고 집들이 들어서고 눈에 보이는 사방이 공사 현장이었다.

부모님은 그런 공사판 인부로 파출부로 휴일도 없이 일하던 그때 우리 육남매를 키우셨다.

사실 거의 돌볼 시간이 없어 우리는 손을 내리면서 서로를 돌보며 자랐다.  


그런 중 나는 너무나 운이 좋게 교회학교 선생님께 발견이 되었다. 꼬질꼬질한 어린아이가 방과 후 도로에서 매일 흙장난으로 시간을 보낼 때 선생님의 눈에 띄어 교회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였다.

여덟 식구 살던 방 두 칸짜리 좁은 집에 비해 교회는 얼마나 크고 웅장한 대궐과 같았던지..

살면서 내내 그 교회가 아마도 서울 어느 한 곳의 엄청난 대형 교회일 것이라 단정하고 살아왔다.  


이제 거의 40년 이상이 지난 지금 그 이름을 인터넷에 조심스럽게 검색해 보았다.

세신교회.. 몇 개의 검색 결과 리스트에 서울 성북구 장위동 세신교회를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클릭을 하는 순간 내 기억 속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아파트 단지 곁의 상가처럼 생긴 교회가 나타났다.

어! 이건 아닌데

내 기억 속 교회는 붉은 벽돌에 전통적인 교회의 모습인데

아마 세월이 너무 지나 그 교회가 사라진 것일까? 아님 이름을 바꾸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재건축이 되었나?  그러기엔 검색된 저 교회의 규모가 너무 작다고 생각되었다.  

그래도 타고 타고 들어가 홈페이지를 만나고 그 홈페이지 속에서 교회의 역사와 과거의 사진을 찾았다.

아!! 하고 탄식이 절로 났다. 이거야 이 건물이지.

나의 교회, 평생을 가슴에 안고 있던 그 교회가 거기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1978-1980년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세신교회

실내는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와글 와글이었다. 그때는 노인이 귀하고 아이들이 흔한 시절이었다.

생생한 기억 속에 나는 국민학교 1학년 성탄절에 은박으로 만든 커다란 천사의 두 날개를 달고 저 무대에 섰다.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주 천사 내려와"라는 찬송의 가사에 맞추어 율동을 했고 그 율동의 일부는 아직도 선명하게 생각난다. 천사의 역할 그러고 보니 정말 큰 배역이었구나! 하는 마음이다.


참 그때 요셉이라는 친구가 가죽 잠바에 깨끗하게 정돈된 머리를 하고 바이올린을 켜던 모습도 생각난다.

부잣집 도련님이 분명하던 그 친구와는 반대로 가난한 어린 계집아이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날은 내 평생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기억에 담겨 있다.


또 선생님은 나의 방학 숙제를 함께 해 주셨다. 그땐 무슨 방학에 숙제가 그렇게 많았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듯하다. (새마을 운동과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에 논다는 것은 아이에게도 죄악시되던 시절이었다. 곤충채집. 일기 몰아 쓰기. 만들기. 그리기 등등 온 가족이 함께하던 숙제는 개학날 한 보따리 가득했다) 사각으로 만든 가방은 선생님의 칭찬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교실밖 커다란 공간에 전시가 되었는데 그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던지  살맛 나던 한때였다.  


그런 시간이 지나 내가 아버지의 고향인 봉화군 봉성면 두메산골로 이사하던 날

서울에서 트럭으로 거의 하루를 꼬박 가야만 도착하는 먼 곳으로 가던 날

새벽 일찍 교회 선생님이 엄마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내가 가는 시골에 교회가 있는지?

혼자서 다닐 수 있는 거리인지? 꼭  교회에 보내 달라고 당부하던 모습이 선하다.  

훗날 엄마는 내가 힘을 다해 교회에 다니고 기어이 목사가 될 그때까지 몇 번이나 그 이갸기를 들려주셨다.

엄마는 그 선생님과 그날의 기억이 내 인생을 좌. 우 했다고 여기신다.

(나는 그 장면이 선명한데 내용에 대해서는 엄마에게 들은 것이다.)


나도 그런 마음이다.

그 일은 내 인생에 여러 번 힘이 되었다.

귀하게 여김 받은 내 존재에 대한 기억

그것은 살면서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지팡이가 되었다.


성북구 장위동 세신교회 과거와 현재 모습



고통을 이기는 방법에 대한 수많은 경험과 이론이 책 속에 말속에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작 고통에 빠지면 참으로 그 복잡한 이론과 경험을 이어갈 기력이 없음을 알게 된다.

살 힘을 내지 못하고

오직 죽을힘을 내는 그런 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래서 이제 그 죽을힘의 방향을 바꾸어 목숨을 다한 사랑과 그 에 버금가는 일들을 기억해 내려한다.

누구나의 가슴에 남겨진 평범한 삶 속에 깃든 사랑의 이야기를 전해 보고자 한다.

사랑이 나를 살게 했음을

사랑이 나를 일으켰음을

사랑이 나를 나 되게 했음과

사랑으로 인해 용서했음을

사랑이 나를 서럽게 했음을

사랑이 나를 무릎 꿇게 했음을

사랑 때문에 수고와 분노와 질투도 견디며 살아왔음을 생의 밑바닥은 모두 사랑으로 기초가 세워졌음을


베드로 전서 1장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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