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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상 Mar 19. 2024

부르심! 그 부드러운 음성.

(걷다가 힘들어 잠시 쉬는 중입니다. 1화-4)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은 그 기억이 나를 훈훈하게 했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흔들리는 생활 속에서 때로는 더한 고난 속에서 그 모든 기억은 봄날의 아지랑이와 같이 가슴에서부터 피어올라 모락모락 나를 살게 했다.


그런 전차로 나는 늘 사랑을 계획했다. 그래서 복지라는 이름으로 아동센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약 10여 년이 흐르고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될 그때 먹거리 문제를 고민하다가 사회적 기업가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생은 길고 한 길을 올곧게 간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일에서 관계에서 불협화음이 생기는 때가 다반사였다.

일의 우선순위도 문제이지만 가치관의 조율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끝내는 신뢰의 문제까지 파고드는 심각한 균열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체력이 일순간에 고갈되고 처음보다 더한 에너지를 들여야 비로소 재 가동이 가능했다.


일은 괜찮은데 관계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렇다 관계의 기술은 또 얼마나 난감한지?

자신감은 자만심으로 해석되어 오해를 부르기도 했다.

성취의 기쁨을 표현하면 우월감과 자기 자랑으로 비추어져 질투와 갈등을 야기했다.

감정은 너무나 예민하고 각 개인의 편차가 커서 가장 협업이 어려운 부분이다.

때로는 넘쳐서 때로는 모자라서 관계는 흐트러졌다.  

그때마다 호흡을 조율해야 했다. 감정을 조율하고 그리고 일과 관계를 풀어가야 했다.

그것은 가끔 나의 모든 의욕을 앗아 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까지 나를 몰아갔다. 쉬어야 했다. 그로기 상태였다. 주먹을 휘둘러도 명중이 되지 않는다. 이대로 더 갈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나는 쉼을 선언하고 그리고 잠시 조율의 시간을 갖는다. 세계적 오케스트라도 악장을 주목하고 활의 방향과 음정을 쉼 없이 조율하듯 그런 집중으로 다시금 나와 주변을 정돈해야 한다. 


여호수아 1장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을 정복하는 그 일은 치우침을 경계하는 삶이었다.

속도는 아랑곳없이 기준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중심의 단단함이 형통을 얻는 비결이라 말씀하신다.

빨리가 아닌 바름이 지름길이다.

이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안다. 엉클어 짐이 얼마나 많은 난관과 소진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나의 일은 신체적 에너지와 더불어 마음씀이 많은 일이다.

사물을 대함보다는 사람을 대하는 그래서 더 예민하고 피로한 일이기에 선한 동기가 없이는 지속할 수 없는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외부보다는 자신을 관리하는 시간이 더 필요한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다 보면 걷다 보면 걸핏하면 치우치기 일쑤였다.



아이들의 불이익을 참기 어려웠고, 힘든 환경을 지켜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살면서 어디서 무엇을 하건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아차 하면 탈선한다.  

학용품과 옷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어린이날과 생일과 명절 그리고 사춘기의 시작과 졸업식등 나와 복지사 선생님이 채워 줄 수 없는 마음의 허기가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였다.  


꼬꼬마 1학년때부터 함께한 녀석들이 군에 입대할 때는 서로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졌다.

그날 그 녀석의 한 마디 말이 내 가슴 한 구석에 무거운 돌 하나를 얻어 놓았다.


"저는 울면서 때를 쓸 사람이 없어서 그게 제일 힘이 들었습니다".

하늘이 멍했다.

.....

그 아이는 왜 내게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을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많은 것을 함께 하고 모든 것을 미리 챙기려 했는데 그 분주하게 돕는 손길도 마음을 건사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일후 내 마음은 더 기울어지고 조급해졌다.

절반은 고아와 같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부성을 알게 하는 것.

 그 허기진 공간을 채우는 것이 그날 이후 나의 사명이 되었다.


기억은 나의 스무 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업 능력이 부족하지 않은 나였지만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고교시절을 보냈다. 아마 꼴찌 중에 꼴찌로 졸업을 했을 것 같다. (성적에 너무 관심이 없어서 그것 조차도 모르겠다) 입학 성적은 분명 상위 권이라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으니 나의 고교시절은 친구와 대화와 독서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입시는 안중에 없었다. 그러다 졸업 무렵 모두가 대학으로 떠나면서 나는 멘붕이 찾아왔다. 그래서 엄마의 권유로 얼떨결에 대구 사촌언니 집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추억 속에 고이 눌러 놓았던 교회를 가게 되었다.

이것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교회에 첫 발을 들여놓던 순간을 내 일생 가장 환희롭고 거룩한 시간으로 기억한다.  

하얀 가운을 입은 성가대의 합창 소리가 교회 공간에 울려 퍼질 때 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장엄한 소리에 압도되어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들려진 설교 말씀은


아모스 5장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나는 짧은 나의 전 생애를 들킨 듯 전율과 집중으로 그 말씀을 경청했다. 두려움과 더불어 각성이 내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음을 이후에 나는 알게 되었다.

그건 도덕을 넘어선 그 무엇이었다. 전혀 내가 모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성경 읽기는 독서실을 끊어서 다닐 만큼 쉼 없이 이어졌다. 엄마가 취업을 위해서 배우라던 컴퓨터 기술은 뒷전이었다. 밤도 좋고 새벽도 좋았다. 나는 기도하며 성경 읽기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렇게 세로로 인쇄된 성경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분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뚜벅뚜벅 내 인생에 걸어 들어오셨다.

내가 사는 세상 속에 그리고 나의 시간 속에 오셔서 앉으시고, 나를 설득하셨고 그렇게 깊이 점령하셨다.

그분의 삶과 부딪히는 순간 나는 심한 통증을 느끼며 한없고 맥없이 눈물을 쏟아 내었다.

멈추지도 않는 눈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뜨겁게 흐르고 또 흘러내렸다.

그건 일순간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었다.

어쩌면 설명이 불가능한 종교적인 체험의 영역이라 말해야 할 것 같다.


그가 가난 한 자와 함께 걸을 때 나는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 따뜻한 연민의 언어가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내 가난한 영혼은 치유와 충만을 경험하게 되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그분은 자주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건 너무나 쉬운 일상의 언어였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가끔 내 고향의 어르신들이 들녘에서 들려주시던 이야기 같았다. 진리와 인생에 대해서 너무나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만물보다 소중한 인간의 가치에 대한 분명한 어조.  

생존의 염려로 가득한 사람의 한날의 삶을 정말 이렇게 설명하시다니!!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 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할 지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그분이 환자들을 향해 손을 뻗으시고,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실 때 새로운 세상이 가슴에 와서 박히었다.

사랑은 정의를 넘어서고

용서는 세상을 품고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의 손이 스쳐서 살아난 자들과

그의 말이 스쳐서 새로운 길로 접어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의 거듭남을 체험하고 있었다.

우물 곁에 앉아서도 목말라하던 그 천대받던 사마리아 여인은

강탈한 세금으로 배가 불렀으나 영혼은 파리하여 나무에 올라 그분의 얼굴을 보기 원했던 세리 삭개오

진리를 가르치며 선생으로 살았으나 정작 자신의 무지에 좌절했던 학자 니고데모

막달라 마리아와 그리고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 새로운 길을 걸어갔다.

그런 부르심 그 콜링이 스물에 접어든 나에게 천둥같이 주어졌다.


그러니 이제 나는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신 그분 앞에서 그 무엇이 되고자 한다.

사랑하므로 진정으로 행복하였노라! 말할 수 있는 그 길에 내게 주신 사람들과 함께 다시금 단정히 걸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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