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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상 May 04. 2022

(사회적 기업)
1.우연히 걸려온 전화

- 복지의 새로운 이름 일자리 창출 -


- 워낭소리 가득한 고향을 떠나서


참 한가로웠던 내 고향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누가 보아도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시의 배경이 되었을 것 같은 그런 곳이다.  실개천이 있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얼룩빼기 황소가 정말이지 게으르게 "음메"하고 우는 곳 그래서 그곳을 차마 꿈엔들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렇다 그런 곳이다. 그래서.. 워낭소리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람을 위로하고 그리움을 자극하는 그곳 봉화군 봉성면이 나의 살던 고향이다. 아버지는 그 따위 것이 무슨 영화가 되냐? 고 호통을 치셨다. 소와 노인의 나른한 삶은 그저 그네들의 일상이기에 사람이 몰려와 북적 거리는 것을 못마땅해하셨다. 나는 거기서 온몸으로 사계절의 기운을 받으며 그렇게 꽤나 긴 세월을 살았다.


내가 아는 한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농사를 지으며 살던 곳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른들은 날씨가 어떻게 되려나 "비가 와야 할 텐데" "물고를 터야 할 텐데" 하고 늘 걱정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아버지에게서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그 걱정을 물려받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도 농부가 되어 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업과 농사일을 병행했으니  영락없이 농부였다. 당연히 내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또 성적이 농사보다 중요하지도 않았으니 별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 우리 형제들에게 아버지는 큰 훈장을 달아 주시며 입버릇처럼 말하시길 " 우리 애 들은 다 지가 벌어서 학교 다녔어 " 애들이 안 도왔으면 그 많은 농사 어림도 없지!!  그런 아버지는 이제 농사를 떠난 지 오래되셨다. 그리고 육 남매 가운데 농사를 업으로 삼고 사는 이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농사 어플을 깔고 그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으며 살고 있다.  참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그렇게 농심의 정서로 가득하던 나는 스물이 되어 도시로 나오게 되었다. 그 총총한 걸음의 속도와 도로 위의 자동차 경적이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매일 아침 나는 동화 속에 시골쥐가 되어 도시의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일상과 마주하게 되었다. 참 적응이 어려웠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시외 전화를 걸면 어머니는 뚝뚝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돈 아끼라며 금세 끊어 버렸다. 그래서 편지를 썼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때 적었던 내용이 지금도 우습다. 아마 응답하라 1988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시골은 훨씬 더 예스러웠다.

엄마 "이곳은 버스가 서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닙니다"

(시골 마을은 버스가 사람 앞에 정확히 멈춘다 그래서 뛸 일이 없다)


"곳곳의 신호등. 그리고 육교와 지하도에서 만나는 구걸하는 사람들..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라 나는 가난한 주머니 사정에도 그 길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혹시나 굶어 죽을까? 혹시나 얼어 죽을까? 걱정이 많았다. 그렇게 첫해 여름을 지낼 때 몸무게가 40kg까지 내려갔다. 난민의 몰골 그 자체였다. 10kg이 빠졌으니 누가 봐도 까맣게 그을린 촌닭 행세였다. 취업은 더 어려웠다. 면접에서 떨어지기 일수이고 그리고 어렵게 구한 직장에 들어가면 딴에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날 "권양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된다"며 봉투를 내미는 상사의 겸연쩍은 얼굴을 봐야 했다. 순전히 나의 잘못이었다. 농사에 익숙한 나는 아주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눈치가 없었다. 민첩성도 부족했다. 거기다 어린 나이라 경험도 부족하니 하루 종일 허리를 숙여 고추를 따고, 감자를 캐고, 사과를 따던 노동환경과는 너무 다른 곳에서 밀리고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고향에서는 그럭저럭 동네서 소문난 일꾼이었는데 아버지 어머니께는 위로가 되는 맘 넓은 딸이 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도시의 삶이 처량하고 외롭기 짝이 없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어.. 내 동무 어디 두고".. 그렇게 노래 부르는 날이 많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 도시에서 만난 시골 아이들


그러다가 참 우연히 나의 시골 어린 시절 같이 꼬질 꼬질한 아이들을 도시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마음이 기울었다. 홀리듯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데려와 시작한 것이 당시는 생소했던 지역아동센터였다. 결식아동들에게 밥을 먹이고자 시작한 일이었다. 급여는 보장되지 않았지만 내게는 참 천직이었다.

학원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방과 후 그 긴 해를 채우려 운동장과 동네 공터를 떠돌았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무작정 데려와 시작한 아동센터가 10여 년의 시간을 채우고 나니 어느덧 그 아이들에게 일거리가 필요한 그때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 대부분은
경쟁력이 없고 시험을 칠만한 학업적 역량도 부족했다. 정말 이지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나와 교사들은 고민이 많은 시절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동센터에서 10년 교사 품에 있던 아이들은 마음이 지독히 여렸다 센터는 아이들의 온실이었다. 경쟁적이지 못했다. 졸업 후 백수가 되어서 센터에 놀러 와 소일을 돕는 아이들이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가난이 대 물림 될까 밤잠을 설치던 어느 날 정말 우연히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 우연과 우연의 필연을 마주하다.


(주)비전 창립 10주년 기념 반지(2018년)

"여보세요"

"예! 노동부인데요 거기 지역아동센터 맞지요? "

"예 맞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아! 안내드릴 것이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혹시 사회적 기업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아뇨! 혹시 전화 잘 못 거신 거 아니세요?

여기는 아동 복지 센터입니다"

"아닙니다. 거기 대표님이 비 영리 민간단체장이라서"  사회적 기업 소개드리려고 연락했습니다"

"저는 생전 처음 듣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예 이게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저희도

그렇습니다. 혹시 책자 보내 드리면 읽어 보시고

관심 있으면 연락해주세요 주소 지로 안내 책자

 한 권 보내 드리겠습니다 "

"예예  감사합니다. "

  "뚜 뚜 뚜............"


이 우연히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무작위로.. 새로운 정책 홍보쯤으로 걸어온 전화 한 통과 안내 책자에 취업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이라는 단어에 눈이 뒤집혔던 것 같다. 그리고 운명도 바뀌어 버렸다. 인생에 많은 일은 계획 없이 순식간에 밀려온다. 

그렇게 사회적 기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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