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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Apr 15. 2023

서생포 왜성에서

사명대사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지금과 같은 컬러텔레비전이 아닌, 배불뚝이 브라운관에 가끔씩은 지지직거리기도 했던 흑백테레비(왠지 TV나 텔레비전보다는 그 시대의 TV는 테레비가 더 정감 있게 들린다)였었다.


낮동안 내내 테레비는 깜깜무소식이다가, 함께 놀던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하면, 한참을 또 함께 놀던 동네 친구들이 갑자기 동시에 사라진다.


 그리고 나면 집마다 신기하게도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30분 정도 오로지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펼쳐진다. 그 당시 채널이래야 KBS, MBC, 그리고 참 재미있었던 TBC(동양방송) 이렇게 3개였고, 어떤 방송사의 경우 내가 사는 울산은 서울보다 1주일 늦게 방송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당시 녹화된 테이프를 받아와서 다시 지방 방송국에서 송출했던 것 같다, 그 기간이 1주일쯤  걸린 것 같다.


아무튼 그 6시 이후 순식간에 사라진 친구들은 어머니가 차려 주신 밥상에 앉아, TBC에서 했던 인형극을 보곤 했었다, 다른 수 많았던 애니메이션들과 함께 말이다.


그중, 한글도 모르던 때(1976년쯤), '사명당'이라는 인형극을 TBC에서 했었다.

무섭고, 창이 옆으로 달린 낯선 모자를 쓴 일본 장수가 우리나라를 침범해서 착한 우리나라 백성들을 죽이는 전쟁이었다.

그 전쟁 중에 사명당이라는 스님이 그 일본 장수와 협상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 스님이 불에 타 죽으라고 어느 방에 들어가게 하고, 방에 불을 엄청나게 뜨겁게 했지만, 다음날 그 스님의 몸 고드름이 달려있어 왜군들이 놀는 장면들이 50년 가까이 지난 이 나이에도 기억되어 있다.


그. 런. 데...


창이 삐죽하게 튀어나온 무서운 모자를 쓰고 있던 그 일본장수와 당당했던 의 협상 장소가 내가 수십 년을 살았던 이곳 울산이라는 사실을 한참 나이 들어 알았을 때의 놀라움과 반가움은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를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서생포왜성

그 무서운 일본 장수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였고,  시원하게 멋있었던 스님은 당호(堂號)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한 사명대사 유정(惟政)이었다.


그래 여기는 400년도 훨씬 전 치열했던 조선과 왜의 싸움에서 일말의 평화를 위해 협상이 벌어졌던 울산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이다.

서생포왜성

어릴 때 그렇게 가슴 졸이면서 보았던 그 인형극 속 왜장과 스님의 협상이 실제 이루어진 곳에 와 있.

서생포왜성

서슬 퍼런 일본도를 든 왜군들 속으로 지천으로 피어 있는 진달래보다 여리디 여린 이 나라의 민초들을 위해, 그는 이곳으로 목숨 걸고 4번씩이나 들어와서 일본 장가토와 평화를 위한 협상을 했었다.


힘겹게 여러 성문을 통과하니 검푸른 동해바다와 무심한 듯 흩어져 있는 아랫마을들이 보인다.

서생포왜성에서 본 동해바다

400년도 더 된 그때 사명대사 유정도 당당하지만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을 그 바다와 그 마을이다.

나라와 민초들에 대한 걱정이 뜨겁게 느껴진다.


그는 그래도 여기서 담담하게 그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했었다


가토: "조선의 보물이 무엇이요?"

사명대사: "우리에게는 보물이 없, 우리의 보물은 당신의 목이요."

가토: "그 무슨 말씀이요?"

사명대사: "전쟁 중에  어디 있겠는가?, 그대의 목 하나면 조선은 전쟁 없이 편안할 것이요. 하여 그대의 머리를 가장 값비싼 보물로 여기오.”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


가토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스님의 포는 가토 기요마사마저 흔들어 놓았다.


사명대사는 가토에게 이런 글 주었다고 한다.

正其誼而 不謀其利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옳은 일이 아니면 이로움을 찾지 말라.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 한 올이라도 탐내지 말라."

적으로 만난 사람이지만, 일본의 맹장 가토 기요마사도 분명 흔들렸을 것이다.


조금씩 한참을 내리던 고마운 봄비도 조금 잦아졌다.

한참을 조용히 앉아 바라보는 동해도 멀리서 보니 고요하다.


여기 서생포왜성은 비록 왜성이지만 사명대사의 나라와 민초에 대한 절박한 연민과 애절한 숨결이 더 느껴지니 가슴 따뜻해진다.


몇 날을 괴롭히던 황사가 가볍게 내리는 봄비에 씻겨 한결 숨쉬기가 편하다.

비에 젖은 진달래

바람에 흩날리던 벚꽃은 땅바닥에 소복하게 흩어진다.

비에 젖은 진달래는 여전히 그 분홍빛이 짙어져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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