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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Oct 08. 2023

산청 정취암에서

행복(幸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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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비가 왔었나 보다.


깊은 산사에 오르는 길이 젖어 있다.

한결 낮아진 바깥 온도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아직 단풍은 이르다.

붉은빛은 드물고, 노란빛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가을비로 나뭇잎들은 조금 바빠질 것 같다.

나는 밤에 몰래 온 수줍은 가을비로 인해 오히려 산사에 오르는 길이 더 느긋해졌지만 말이다.

또 비 온 뒤의 공기도 더욱 차분해지니, 새벽부터 서두른 보람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없지만, 그냥 예쁜 이름에 끌려 이곳에 오고 싶어 졌었다.

집에서 멀어 늘 마음속으로 그리다, 또 인연이 되어 참 좋은 날 오게 되었다.

아직 지리산 자락에도 단풍은 이르지만 말이다.

지리산자락 큰 바위들이 둘러싸고 있는 여기는 경상남도 산청 정취암(山淸 淨趣庵)이다.

꼬불 꼬불 한 산길 한참 달려왔다.

물론 절집 앞까지 자동차로 올 수 있어 다행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산청 정취암(山淸 淨趣庵)

세상을 굽어 살피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원통보전(圓通寶殿) 뒤로, 늘 우리들 글 그림에서 영험하다고 전해오는 거북바위 한쌍이 큰 바위 위에 있다.

마당을 지나시던 스님께서 자랑스러우신듯 쌍거북바위에 대해 설명 주신다.

정취암 쌍거북바위(靈龜岩 영귀암)

부부, 무병장수, 사업번창, 자손번영...

다 고마운 말이기에 이 거북바위들이 마냥 예쁘고 또 신기하다.

딱 보고 있자니 정말 그냥 거북이 한쌍이 맞다.

머리도 등딱지도 발들도...

스님께서 바위에 올라 그 쌍거북바위를 만져봐도 된다고 하셨다.

한참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만져 보니, 내 손의 온기인지 바위의 온기인지 고맙게도 가슴도 머리도 따뜻해진다.


거북바위 뒤로 조금 더 오르니 더 큰 바위로 된 전망 좋은 곳이 나온다.

절이 없었다면 야호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다.

정말 일요일 비 오는 아침부터 올라오길 잘한 것 같다.

진부하지만 으로 그린 듯 산과 구름이 한참 발아래다......


큰 바위에 한참을 누워본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이 없어 다행이다.

진짜 한참을 누워 있었더니, 혼자 있었도 민망하다.

그래도 찬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져 좋다.

죽어버린 고목도 딱 그 자리에 있어야만 완성되는 풍경이다.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하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 것들은 존재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있을까 한참을 생각해 본다.

그것이 보이던 보이지 않던 말이다.


어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다 그 필요성이 있는 게 맞다.

그들 중에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게 많아진다면 그것이 행복(幸福) 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싫어하는 것들을 그냥 다 좋아할 수는 없기에 조금 더 이해하려고, 극복하려고 한다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것 같다.

또 좋아하는 것도 아끼고 사랑한다면 행복은 더 짙어질게 틀림없지 않을까.

정취암 좋은 곳에 오른 것도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것이 하나 더 생겼으니 말이다.

산사 뒤 숨 막히게 멋진 풍경에 행복해지는 걸 보면 말이다.


바람이 차다

지리산의 이른 아침 가을바람이 차다.

초가을인데도 글을 쓰는 손이 시린 걸 보면 높이 올라오긴 했나 보다.

저 멀리 산 아래 게으른 수탉의 울음소리도 바람 소리만 고요한 큰 바위 위에서 들으니, 행복 해진다,

솔잎 사이에 흩어지는 바람소리도, 먼 곳에서 들리는 게으른 닭울음소리도, 나뭇잎 하나 없는 고목도, 더 진한 소나무도, 구름진 아득히 먼 앞산들도, 푸르름을 금은 회색빛 하늘도, 그리고 그 속의 나도.

무엇 하나 빠진다면 한없이 슬퍼질 것 같다.

모든 게 다 행복의 요소들이었다니...


산사의 공기가 차다.

이제 따뜻한 커피 한잔 하러 또 한참을 내려가야겠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으로도 행복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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