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같던 교육원 인턴 생활,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던 국내선 3개월 근무를 마치고 나니
매일매일이 새롭고 긴장되는 비행의 세계가 펼쳐졌다.
“오늘은 어디로 가지?” “오늘 만날 선배는 어떤 분일까?”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매일.
그 불확실성은 ‘눈치’라는 감각을 바짝 세우게 했고, 우리는 ‘센스’라는 무기를 장착해 살아남아야 했다.
2년쯤 지나자, 이 모든 게 익숙해졌다. 비행 때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는 긴장감. 하지만 끝나면 곧장 사라지는 업무 관계. 퇴근하면 바로 해방. 이 스타일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러던 2004년, ‘그룹제’라는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제부터는 무작위가 아닌, 고정된 팀—그룹장과 그룹원들이 묶여 함께 비행해야 한다는 제도였다. 선배가 좋으면 최고의 팀, 하지만 까다로운 그룹장을 만나면 1년 내내 고생길. 모두가 긴장했고, 그룹 발표가 나자 서로의 그룹장을 묻는 질문이 이어졌다.
“나미 씨, 그룹장님 누구세요?” “제온 매니저님이요.” “와, 진짜 좋겠다! 우리 회사 최고 젠틀맨이잖아요! 그리고 제온 매니저님 윙어스에서 드럼 치시는 거 알아요? 지난번 공연 봤는데 언더그라운드 밴드 뺨치던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나도 밴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교 시절, 내 기타 동아리방 옆방은 헤비메탈 밴드방이었다. 나는 외롭게 클래식 기타 선율을 연주했고, 옆방에서는 쿵쾅쿵쾅 메탈 사운드가 울려 퍼졌다. 그 시기, 나는 퀸, 데프 레퍼드, 주다스 프리스트에 빠져 있었고 언젠가 그 소음 같은 음악에 나도 뛰어들고 싶었다.
나한테 기타를 배우던 남자 후배가 옆방 오디션을 보고 동아리를 옮겼을 땐, 배신감보다는 부러움이 더 컸다.
그룹제가 시작되고, 제온 매니저님과의 첫 비행. 나는 내심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나도 윙어스에 들어갈 수 있을까?’
유니폼 바지에 빳빳하게 다려진 주름, 앞머리를 우아하게 넘긴 제온 매니저님이 다가오셨다.
“나미 씨, 클래식 기타 쳤다면서요? 윙어스에서 잭한테 일렉기타 배워볼래요?” ‘잭 선배님...? 지난번 무뚝뚝하고 눈썹 진한 무서운 선배님!’ 잠깐 주저했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 정말 배우고 싶어요, 매니저님.”
“다음 주 수요일에 합주 있어요. 나미 씨 쉬는 날이던데, 김포 화물청사 지하 합주실로 오세요.” “네! 꼭 가겠습니다!”
합주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기타를 품에 안은 채 설렜다. ‘딴딴딴딴!’ 벽 너머로 신나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십니까, 기타 치고 싶어서 찾아온 허나미입니다.”
“어서 와요!” 헤이즐 선배가 옆집 언니처럼 반갑게 맞아주고 따뜻한 차를 내왔다.
“레온이 교육원에서 봤다고 했던 나미 씨네.” 제온 선배님이 웃으며 말했다. “잭아, 네가 일렉기타 좀 잘 가르쳐줘라.”
그때, 하얀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로저스 선배가 말을 끊었다.
“그래도 오디션은 봐야죠. 나미 씨, 기타 가져왔으니 한 곡 쳐보세요.”
나는 심호흡을 하고, 클래식 기타의 자존심이자 나의 대표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했다.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조용히 내 연주를 들었다. 그리고 로저스 선배가 물었다. “선배님, 오디션 결과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연히 합격이지, 합격.” 제온 선배님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이미 레온 선배에게 듣고 나를 그룹에 배정해 둔 거면서, 기타 멤버로 확정해 두신 거면서, 굳이 오디션이라니. 후훗.
그렇게 시작된 윙어스와의 인연. 21년째다.
그때 사정을 다 아는 지금, 그저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