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어느 날. 세호 선생님께 레슨을 받던 중 더 좋은 기타로 갈아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기타 판매업을 하는 한 남자를 소개해주었다. "명관이 기억 나시죠? 지난번 공연 뒷풀이에서 만났던 애요."
그는 시원한 디스토션 사운드를 뿜어내는 파란색 기타를 추천해줬고, 나는 그 기타를 구입했다.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기타를 소개해준 것이 고마워 “다음에 술 한잔 살게요”라고 인사했더니, 그가 말했다. “술은 제가 사야죠.”
그렇게 우리는 호텔 라이브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밴드 음악을 듣는 만남을 시작했다. 바에서 연주하던 필리핀 밴드는 정말 끝내줬고, 우리는 그 공연 보는 재미로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만났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모른 척하고 싶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질끈 묶고 동그란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속으로 ‘마당쇠 같네’라고 생각하며, 그저 다른 남자들처럼 선 넘지 않는 관계로 지내길 바랐다.
그러던 어느 발렌타인데이, 알고 지낸 지 만 2년이 되던 날, 그는 머리를 풀고 나왔다. 그리고는 목걸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어머, 자기가 테리우스라는 거야 뭐야? 그리고 웬 목걸이?’ 놀란 나는 “저 이거 받을 수 없는데요”라며 거절했고, 집으로 돌아와 ‘이제 끝이다’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끊자니 이상하게 허전했다. 그가 지난 2년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내 옆에 머물며 얼마나 많은 마음을 삼켰을지 떠오르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 마음속에 존재감을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만날 때마다 기타 피크, 열쇠고리, 음악이나 드라마를 리핑한 DVD 같은 소소한 선물들을 건넸고, 컴퓨터를 켜고 네이트온에 접속하면 곧바로 클래식, 팝, 락, 메탈 음악 MP3 파일이 도착했다.
그렇게 작은 선물로 포장된 무수한 마음들이 어느새 내 마음의 빗장을 열고 파고들었던 것이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목걸이 받을게요.” 그는 기뻐서 곧장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긴 머리 때문에 제가 다가가기 힘들어요.” 다음 날, 그는 10년 가까이 길렀던 ‘라커의 자존심’인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교제를 시작한 이후, 나는 사랑받는 여자가 이렇게나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보호하려 했고, 가벼운 핸드백조차 본인이 들었다. 매일 문자로 사랑을 속삭였고, 커플 다이어리에 사진과 글로 러브레터를 쌓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식. 1년간 공들여 준비한 결혼식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호텔에서 열렸다. 신랑 신부 동시 입장곡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곡, 잉베이 맘스틴의 ‘Air’(J.S. Bach Aria Suite No.3)였다.
락 기타로 이어진 인연답게, 김도균 선생님이 가죽 수트를 입고 주례를 맡았고, 축가는 남편이 존경하는 K2의 김성면 형님이 고음을 뽐내며 불러주었다. 이어지는 성유빈님과 정가희님의 듀엣, 그리고 남편의 답가—그가 매일 밤 전화로 불러주던 잉베이 맘스틴의 ‘Prisoner of Your Love’를 지하드 박영수 형님의 기타 반주에 맞춰 불렀다.
이 모든 것은 남편이 기획하고 연출한, 우리만의 환상적인 무대였다.
그로부터 벌써 결혼 15년. 우리는 아름다운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고, 그는 여전히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준다. 때로 속물적인 내가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도, 그는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붙잡아준다.
이 평온한 사랑, 이 안정된 관계에 매일 아침 감사하며 나는 출근하는 남편에게 외친다.
“일찍 와요. 사랑해요.”
*Prisoner of Your Love - Yngwie Malmsteen*
My heart fell into the palms of your hands
This love made me understand
I've waited all my life for you
Thought I'd live and die alone
Encaptured by the beauty
I'm a prisoner of your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