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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Feb 08. 2024

욕구가 적다는 것이 주는 우위

더 사랑하는 쪽은 정말 더 약자인가?


사랑을 하나하나 몸으로 배워가던 시기,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연애를 하면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는 인식이 나에게는 진리였다. 더 좋아하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거부하기 어려웠고, 상대가 나를 거절할 때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창보다는 방패로 철저히 무장했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강렬히 원하면 안 되었다. 너무너무 가지고 싶은 것은 갖지 못했을 때 괴로움이 너무 크니 애초에 덜 원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영원한 승자로 크게 상처받지 않고 사랑이라는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십 대의 연애에서 연애를 시작하는 맨 마지막 기준은 '그 사람은 나에게 미쳐있는가?'였다.


"그 사람이 본래의 이성적인 모습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사랑의 행동을 나에게 하고,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 아낌없이 주는가?"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미쳐있는', '나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하는' 기준이었다. 나는 아니지만 너는 나에게 그렇기를 바라는 불평등하고 얄미운 잣대를 나는 결혼하는 순간까지 유지했었다. 하지만 상대를 속이고 내가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기에 나는 솔직했다. 나는 미쳐 있지 않다고. 하지만 너는 나를 완전히 좋아해 달라고 뻔뻔한 고백을 했었다.


그런 나에게 가장 안심을 주는 사람은 지금 나의 남편이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자신을 좋아하냐는 현 남편 구 대시남의 물음에 "좋아하진 않는다."라고 하니 그가 매우 밝은 얼굴로 답했다.


"싫지만 않으면 됐어요!"


자신을 싫어 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사람의 사랑이 맘에 들었다. 연애를 할 때는 그 우위가 참 달콤했다. 높은 산에 깃발을 꽂고 모든 것을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그는 나에게 어떤 전략을 구사하지 않고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줬다. 싫지만 않으면 된다고 반짝 웃던 그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소리쳤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살면서 나는 이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보석이라는 믿음이 어그러진 적이 없었다. 더 사랑하겠다는 사람이 주는 위안과 안정을 나는 아기새처럼 입을 쩍쩍 벌리고 받아먹었다.


연애를 하며 더 사랑해서 괴롭다는 친구의 고민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라 나도 그녀도 사실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더 사랑해서 더 자신이 매달리게 되고 기다리게 되고 불안하게 되는 상황을 힘들어했다. 자신이 사랑하는데 그 기대만큼 오지 않음에서 오는 힘듦이었다. 자신을 더 사랑해 주길, 더 챙겨주고, 먼저 연락해 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아마, 나의 연인은 내가 자신을 싫어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기대로 시작했으니 내가 어떻게 하든 싫다고 가라고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것이다. 지금도 남편의 마음이 편한 이유를 보면 바다 밑바닥에 붙어 있는 듯한 기대가 크게 작용을 한다.


10년이 넘어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남편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도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친구들과 싸우지도 않고 마음이 불편해져 멀어지지도 않았다. 일을 하면서도 저게 인간인가? 싶게 무례하지만 않으면 그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예민하지 않고 까다롭지도 않다. 순댓국을 먹어도 좋고 스파게티를 먹어도 좋다. 자신을 괴롭히고 밥을 못 먹게 하고 잠을 못 자게 하지만 않으면 그는 행복하다.


남편이 출근하고 집에 없으면 가끔씩 나는 산에서 야호를 외치듯 그의 이름을 부른다. 초딩 아들이 '엄마 또 저래'라는 표정으로 질색을 하지만 나는 게의 하지 않는다.


"보고 싶다!"


두어 번 외치고 나는 설거지를 하고 애 공부를 챙기고 청소를 한다. 많은 경우 나의 얘기를 어느 것도 순순히 들어주지 않는 아들에 대한 반감과 아들과 너무 다른 남편에 대한 그리움의 외침이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집에서 유일하게 한 대있는 텔레비전의 리모컨과 경제권과 그의 정절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사랑의 우위를 점령하지 않는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하는지 내가 그를 더 사랑하는지 어느 순간 헤아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믿은, '욕구가 적다는 것이 주는 우위' 실제 욕구가 적은 것이 아니라 욕구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애착에 대한 욕구가 있었으나 지독하게 자기애가 강했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견뎌했다. 그래서  자신이 열렬히 사랑해서 얻는 기쁨보다는 상대가 나를 사랑해서 내가 통제할  있는 안정을  원했다. 나는 나에게 득이 되는 기쁨 보다 해가 되는 괴로움을 줄이기 위해 통제가 가능한 위치를 선점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이 컸으나 자신이 준 만큼 그대로 받겠다는 기대가 없었다. 물론 완전히 없지는 않았겠지만, 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렇기에 그는 내가 산꼭대기에 있든 바닷속에 있든 크게 영향받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욕구는 적은 것이 분명 더 자유롭고 행복하다. 나는 여전히 통제되지 않는 상황, 계획에서 빗나간 상황을 미치도록 불편해하고 불안해하는데 그것이 나의 욕구와 기대에서 온 것임을 안다. 산은 아무리 올라도 더 높은 산이 나온다. 인생이 그렇다. 그래서 오늘도 법륜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괴로움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집착에서 온다"라고 하셨다. 그러니 더 높이 올라가려 하지 말고 더 내려놓으려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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