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안녕하세요.
은호예요.
저는 지금 미국에 있어요. 그런 일이 있고 갑자기 떠나 버려서 제대로 감사 인사도 하지 못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 후로, 저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마음에 걸렸었어요. 죄송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얼굴도 본 적 없는 이복동생의 조혈모세포이식 수술 때문에 엄마와 함께 미국으로 갔었어요. 제 골수 빼먹으려고 15년 만에 나타났다고 한 아빠 기억나세요? 정말 나쁜 놈 맞았는데 다행히 돈 많은 개새끼였어요. 이복동생에게 이식을 해주는 대신, 이제까지 받지 못한 양육비도 받았어요. 제대로 한 방 먹였죠. 유산도 미리 증여받았는데 아직 써보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제 골수를 준 건 아빠나 엄마, 돈 때문은 아니었어요.
저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놈들이 감옥에서 나와서 저에게 복수를 할까 봐 겁나기도 했고, 그런 일이 있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내는 것도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다시 혼자되는 거였어요. 보육원에 있을 때처럼요.
저 엄마가 형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진짜 미치면 엄마가 저를 떠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정말 창피하네요.
저는 엄마에게 평생 짐이었어요. 그때는 완전히 패륜아처럼 굴기도 했고요. 미친놈처럼 굴수록 엄마가 저를 버릴까 봐 더 두려웠어요. 그럼 또 제어가 안 되어 더 막 나가고요.
그런데 엄마가 형을 만난다는 걸 알았을 때는 진짜......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엄마가 저를 떠날 것 같았어요. 나도 내가 싫은데 그런 나 때문에 엄마가 제 옆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도망갔어요. 비겁하죠.
저는 이번 학기에 영국에서 미국에 있는 기숙학교로 트랜스퍼했어요. 대학도 미국에서 가고 싶어요. 런던은 너무 작고 올드해요.
저는 이제 괜찮아요. 미국에 와서 여자 친구도 생겼고요.
엄마는 지금 런던에 있어요.
알려 주고 싶었어요.
엄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From. 은호
지수가 은호의 DM을 확인한 것은 제대를 보름 남긴 때였다.
윤영이 떠나고 지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하던 학교에 입학이 결정되었고 디모토의 숙직실을 나와 아버지가 마련해 준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하지만 집을 두고도 대부분 날을 디모토의 작은 숙직실에서 구겨져 지냈다. 지수를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기둥 하나가 뽑힌 것 같았다.
전과 달라진 점은 아버지와 한 번씩 만나 밥도 먹고 낚시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수의 아버지는 결국 아내와 이혼했다. 남편이 상간녀의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후,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남편이 그의 아들과 짜고 자신을 철저히 속였다고 믿었다. 남편의 대학에 찾아가 난동을 부리기도 하고 지수의 오피스텔로 찾아와 물건을 때려 부수기도 했다. 그녀가 느낀 배신감은 ‘교수 아내’라는 허울을 던져버릴 만큼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다른 누구도 누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대학에 그가 과거 제자와 바람이 나서 혼외자를 낳았다는 내용의 투서를 반복해서 넣었다. 민정철은 결국 교수자리를 퇴직하고 나왔다. 그가 실직자가 되었을 때, 그녀는 남편의 유책으로 이혼을 요구했다. 그는 서울의 집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잃은 아버지는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이제야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으로 메여있던 족쇄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드디어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지수의 아버지로 만 설 수 있었고, 평생을 그리워한 연인에게도 솔직해질 수 있었다. 아버지도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사는 것 같았다. 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혼자 산책을 하고, 낚시를 가고, 주말이면 옛 연인을 찾아갔다. 지수에게 국밥을 먹자고 전화하기도 하고, 같이 낚시를 가자고 데리러 오기도 했다. 지수는 그런 아버지가 당혹스러웠지만, 마땅히 다른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종종 아버지와 낚시하러 다녔다.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캠핑용 의자에 앉아 찌를 보고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좋았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4년제 대학에 가거나 유학을 권하는 아버지에게 지수는 더는 날을 세우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가도 윤영이 생각났다. 다치지 말라는 그녀의 마지막 편지가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오토바이를 완전히 포기하진 못했지만, 배달은 하지 않았다. 웬만한 거리를 걸어 다녔고, 가끔 윤영의 차를 끌고 그녀와 갔던 캠핑장을 갔다. 학교 성적은 바닥이었다. 이대로 학교에 다니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을 엉망진창으로 보내고 입영 신청을 했다. 윤영이 지수를 떠나고 1년이 지난 때에 입대했다.
그리고 은호의 DM을 받았다. 제대를 앞둔 하루하루가 1년 같았다. 자존심도 없이 마음은 이미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간 심심해서 열심히 운동한 것이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영국에 대해 찾아봤다. 빨리 제대해서 여권을 만들고 런던으로 날아갈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키스하고, 안고 뒹굴고 싶었다. 지갑 속에 그녀가 마지막에 주고 간 콘돔이 여전히 들어있었다.
9월이 되어서야 히스로 공항에 떨어질 수 있었다. 은호가 보내준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하고 이날을 기다렸다. 캐리어에 3년 전 경찰서에서 주워왔던 그녀의 빨간 하이힐을 챙겨 왔다. 다시 한번 그 구두가 그녀를 만나는 큐피드가 되어 줄 줄은 몰랐다. 히스로 공항 앞에서 그 하이힐을 꺼내 사진을 찍고 SNS 프로필에 올렸다. 혜림이 본다면 변태라고 욕했겠지만 상관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전화했다.
그동안 소설 [숨통]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